사이 

김재홍 시인

형,

말 등에 손을 얹었습니다

이 말은 2200년 전에는 살아 꿈틀대는 엉덩이를 가졌었습니다

용갱의 말 엉덩이에 손을 얹고

형께 문자를 보냅니다

여기는 부암동,

부침바위가 아이들 셋을 한번에 점지한 곳입니다

거북과 해태가 골목에서 빗돌을 지키는 밤

저는 형의 얼굴과 흰 머리와 어깨를 생각하며

맨해튼이라든가 롱아일랜드라든가 브룩클린을 떠올립니다

형은 곧 떠나시지만

저는 다시 컴컴한 골목에서

문자를 보내겠습니다

오늘은 유난히 춥고 아이들은

그래도 애비라고 늦도록 기다립니다

눈앞의 진실 앞에 진실해지겠습니다

형의 건강과 행복과 아름다운 영화를 위하여

형의 또 다른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소서!

[ 사이, 이별과 불일치 혹은 ] 

다른 동네와 마찬가지로 부암동에도 치킨집 몇 곳이 있다. 그 가운데 한두 곳은 멀리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도 하고 청춘 남녀들을 줄 세워 아까운 시간을 축내게도 한다. 치킨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고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을까만 부암동 비탈의 가게들은 비록 좁은 골목에 들어섰어도 제법 유명한 집들이다. 

그 비탈의 치킨집 가운데 후발 주자이자 명성에서 도저히 앞선 가게들을 따를 길 없었던 ‘사이’를 빛나게 한 건 치킨이 아니다. 청양고추 듬뿍 넣은 간장 소스와 아낌없이 넘치게 내주는 숙주나물 데침이 최상위 메뉴다. 치킨집 ‘사이’는 숙주나물로 온전히 일어선 가게다. 

그런데 두 사람의 교행이 거의 불가능한 컴컴한 골목의 ‘사이’를 지켜 주는 도타운 신물(神物)은 따로 있다. 용갱의 병마와 거북과 해태는 흐릿한 좁은 비탈을 꼿꼿하게 서서 영검한 자태를 드리우고 있다. 이 가게를 지켜 주는 것인지 이곳을 찾는 손님에게 신기(神氣)를 내리는 것인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사이’에 이로운 모종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확실히 느끼게 된다. 

또한 말과 거북과 해태는 그날,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던 한 중년의 절박한 고뇌와 차가운 현실을 확실히 위무했다. ‘사이’가 있어 ‘사이’의 신물들로부터 위로를 받은 시인은 표현 욕망과 수사의 유혹을 뿌리치고 가감 없이 사실대로 <사이>를 적었다. 정말로 말 등에 손을 얹었고 문자를 보냈고 무언가를 떠올렸고 새로운 다짐을 하였고, 그것을 그대로 기록했다. 

작품 <사이>에는 시적화자의 드러난 행동과 사유를 연결하는 이중의 고리 같은 게 있다. 하나는 순차적 배열의 고리, 다른 하나는 명암 혹은 희비의 심상. 그러니까 <사이>에서 시인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행동하고 사유하되 밝음과 어두움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밝음’은 시간상 미래이며 어떤 의지와 다짐인 데 반해, ‘어두움’은 현재이며 바로 눈앞에 펼쳐진 어떤 상황이다. 

아이들 셋을 점지한 부침바윗골 부암동에 사는 화자와 뉴욕으로 떠날 형과의 거리 혹은 이별은, 불가역적인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밝음과 어두움의 불일치를 야기한 <사이>의 뿌리가 되고 있다. 시의 전반적 분위기를 대체로 어둡고 무겁게 형성되도록 이끌어 간 것이 이별과 불일치기 때문에 시인은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작품 <사이>의 시적 모티프는 사이라는 단어 자체에 있다. 2200년 전과 현재 사이, 골목 사이, 치킨집 사이, 부암동과 뉴욕 사이, 진실은 확실히 사이에 있다. 사이를 낳는 이쪽과 저쪽 혹은 대칭적 주체들에게서 진실을 기대할 수는 없다. <사이>는 몇 가지 대자적 관계들 사이에 서서 사이의 본질인 이별과 불일치를 통해 인간적 진실을 겨냥하고자 한 작품이다. 

또한 뉴욕으로 곧 떠날 형을 만나지 못하고 치킨집 ‘사이’ 골목에서 용갱의 말 엉덩이에 손을 얹고 문자를 보내는 화자의 거리(이별)도 중요한 모티프다.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며 도달한 목표가 아닌 데 <사이>의 시적 진실이 있다. 이루어진 역사거나 도달된 목표였다면 결코 시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형과의 거리가 없었다면, 함께 즐거울 수는 있어도 시는 자라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이>는 이루고자 하는 무엇 혹은 도달하고자 하는 무엇을 향해 구원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만나지 못하고 만날 수 없는 모든 사이를 위한 구원의 신호. 너무 거창한가? 

하지만 지상에서 쏘아 올린 구원의 언어가 결코 인간에게 실현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구원은 천상에 있지 않고 차라리 지상에 있다. 지상의 비참과 고통이 곧 구원이다. 확실히 시는 지상에 살며 천상을 꿈꾸는 인간에게 선사된 유일한 탈출구다. 

종말이 곧 구원이라는 모순된 진실 앞에서도 인간은 구원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위아래 없이 동일한 유한자(有限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지상의 고통을 응시하면서도 천상을 향한 언어로 구축될 수밖에 없다. 천상은 결코 우리에게 구원을 선사할 수 없지만, 인간은 죽을 때까지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존재이다.

김재홍 시인 2003년 중앙일보로 등단 시집 『메히아』(2009), 『다큐멘터리의 눈』(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