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 당신 말이야 - 서울지방변호사회 회보

마그리트, 당신 말이야

조현석 시인
승인 2017.05.02 10:41
호수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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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밖의 당신, 구름을 저주한다 군홧발로 짓밟고 깔아뭉개며 다닌다 구부러지거나 휘어진 시간 밖으로 튀어나온 구름의 불만을 길게 늘어뜨린다 절망 외에 드러나지 않는 피곤한 얼굴 검게 변한 몸만 점점 더 비대해진다 상아파이프로 피워야 제 맛인 담배 살짝 금이 간 파이프 사이로 금세 사라질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영혼의 구름 끊임없이 모락모락

구름 위를 걸을 땐 절대 시간에 속지 마라
멈춘 적 없이 흐르기만 할 뿐이지
가벼운 인생을 꿈꾸다니 제발 그러지 마라
헛발 내딛을 순간에는 정말 정신없지
때마침 부러지거나 삐어버리는
발목 없는 다리로 혹은 다리 없는 발목으로
걸어가 다시 성질부리며 그놈의 구름만 짓이길 테니
그런데 그건, 그림 밖의 당신이 만들어낸 담배연기
혹은 축축한 한숨 위였다는 건 알아챘을까

그림 밖의 당신, 그림 안의 구름 가득한 하늘에 갇힌다 그 안에서 훨훨 날아다니지만 결코 자유롭지 않다 무거운 새벽의 고독에서 벗어나 정녕 가볍게 살고 싶다고 자주 되뇌이며 그렇게 살고 싶지만 무거운 바위덩어리로 변한 구름만 계속 가슴에 얹힐 뿐이다 뿌연 페퍼포그에 눈물콧물 쏟아내며 자유! 자유! 자유! 외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그는 여전히 불멸로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준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제목이「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 스케치」이다. 이 시는 노르웨이 화가 뭉크의 대표작 <절규(외침)>를 소재로 하여 한겨울 춘천의 공지천과 소양댐으로 가는 길에 있는 소양교 부근의 일몰 풍경을 배경으로 고독한 인간의 내면 고백을 시로 쓴 것이다. 1982년 경기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인이 되고 싶어 수년 동안 춘천에 사는 소설가 이외수 선생을 매주 찾아뵌 적이 있다. 소양댐 아래 샘밭이라는 곳에 사는 이외수 선생 댁으로 가려면 춘천역이나 춘천버스터미널에 내려 시외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했다. 그 시절 자주 접한 춘천 풍경들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서울의 한복판, 중구 산림동 128번지가 본적지이고 고향이다. 사람들에게 흔히 을지로4가라고 말해야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이름뿐인 국도극장 앞 큰길 건너 뒤편 철제상들이 많은 골목길 안에 고향집이 있었다. 문 밖을 나서면 위험하고 무거운 철판과 파이프 등 쇳덩어리들이 곳곳에 널린 골목길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작고 가벼운 전기전자부품 상점이 많은 세운상가 2층 공터를 놀이터로 삼을 때가 많았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은 시골이 고향인 사람보다 정서가 메말라 있다. 왜 아니겠는가. 마음을 포근하게 해줄 산과 들녘, 이름 모를 풀꽃과 나무가 자라고 귀를 간질이는 시냇물 소리 대신 수직으로 높게 솟은 고층 빌딩과 밤새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과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소음을 내는 자동차와 문명의 이기들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까지 내가 자연이라며 접한 것은 일요일 새벽마다 아버지를 따라 남산 중턱 약수터까지 갔다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오르던 남산 초입에 서울예술전문대학이 있었다. 1983년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이듬해 2학년이 되어 시창작 수업 때 만난 오규원 시인은 내 인생에 커다란 깨달음을 전해준 분이다. 선생은 “김소월, 김영랑, 한용운, 서정주 등 해방 전후 시인들의 주요 시 소재가 자연이라면, 산업화된 도시 속에서 자란 너희들의 자연은 도시이기에 도시 속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말로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 후 나는 내가 자란 도시를 더 유심히 관찰했다. 자연을 자주 찾지 못한다는 변명 대신 국내외 유명 화가들의 화집을 곁에 두고 많이 들여다봤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려놓은 자연과 여러 사물, 자신들 멋대로 해석하고 이해한 그림을 보고 또 봤다 .

시인이 된 이후 나는 꽤 많은 화가들의 그림을 시로 만들어 발표했다. 이중섭과 김수근 등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들과 반 고흐, 폴 고갱, 마르크 샤갈, 툴루즈 로트렉, 르네 마그리트 등 외국 유명 화가의 그림이 나의 시가 되었다. 그들의 그림 속에 들어 있는 독특한 시선과 화법을 나의 자연인 도시에 이입시켜 나만이 드러낼 수 있는 도시적 서정시로 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