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법률판례 나의 소송이야기
현장은 진실을 말한다

형사사건의 경우 수사기관에서는 피고인에 대한 유죄의 입증을 위해 현장검증을 실시하는 경
우가 많지만, 변호인의 경우 현실적 제약 등으로 인해 대부분 기록 자체에서 드러난 관련 당사자들의 진술을 탄핵하는 수준에서 변론을 준비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또한 예외는 아니었는데, 아래 사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직접 현장에 나가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할 큰 단서를 발견한 이후에는 변호인의 경우에도 무죄를 다투는 사건에 있어서는 수사기관 못지않게 현장검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변호를 맡았던 사건의 공소장에 기재된 공소사실 및 피해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피고인과 피해자는 교제를 하던 사이였는데,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헤어지자고 하자, 피고인이 이를 거부하면서 피해자를 억지로 피고인의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감금을 하고, 거기서 피고인이 피해자를 사무실 창문이 있는 벽 바로 앞에 세워 둔 채 골프채를 휘둘렀는데, 그때 피해자는 골프채를 피하려다 허리를 삐끗하며 상해를 입었고, 또한 그 과정에서 골프채 헤드가 피해자가 서있던 벽면의 반대편 벽면에 부딪히며 그 벽면에 골프채 헤드자국까지 남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수사기록에는 피해자의 주장처럼 벽면에 생긴 골프채 헤드자국, 허리를 삐끗하며 상해를 입었다는 진단서 등 피해자의 주장에 부합되는 증거들이 다수 제출된 상태였습니다.

저도 위 사건을 맡아 처음으로 구속된 피고인을 접견하러 갈 때까지만 해도 통상적인 치정사
건이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피고인은 처음 접견
을 온 저에게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은 피해자에게 골프채를 휘두른 사실이 없다. 피해자가 주장하는 위치에서 골프채를 휘두를 경우 반대편 벽에 골프채가 닿을 수도 없다. 사무실 벽면 골프채 헤드자국은 골프를 좋아하는 피고인이 평소 사무실에서 스윙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벽에 부딪혀 발생한 흔적인데, 평소 피해자가 피고인의 사무실에 자주 놀러왔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헤어지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허리를 삐끗한 것은 당시 눈이 오는 날이었는데 차 안에서 피해자가 피고인과 말다툼을 하다 갑자기 화를 내며 차에서 내리다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발생한 사고다’라며 억울함을 강하게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피고인에게 ‘왜 그럼 수사과정에서 위와 같은 점을 제대로 항변하지 못했느냐’고 묻
자, 피고인은 수사를 받으면서 수차례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였으나 수사기관이 묵살했다고 하였습니다. 피고인의 위와 같은 안타까운 하소연에 저도 현장검증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어 공판기일에 위와 같은 사정을 소명하면서 현장검증을 신청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소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현장검증 신청은 기각되었습니다.

한편 다른 때 같았다면 현장검증 신청이 기각되었으니 그쯤에서 어쩔 수 없겠다 싶어 포기할 수도 있었는데, 위 사건의 경우 접견 당시 보았던 피고인의 눈물과 억울함이 가득했던 말투가 마음에 걸려 도저히 거기서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나 스스로라도 한번 현장에 나가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피고인 측 가족들에게 요청해서 골프 티칭프로를 섭외한 후 함께 범행현장 사무실을 방문하여 수사기록 및 증인신문과정에서 이루어진 피해자 및 피고인의 진술을 바탕으로 각 당사자의 진술에 따른 상황을 재연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피고인의 주장대로 피해자가 주장하는 위치에서 골프채를 휘두를 경우 사무실의 면적을 고려하면 물리적으로 도저히 골프채 헤드가 반대편 벽에 닿을 수 없었고, 설령 골프채 헤드가 반대편 벽에 닿았더라도 백스윙 형태로 벽에 닿기 때문에 벽면의 자국이 ‘∧’ 모양으로 나야 하는데, 사무실 벽면의 골프채 헤드자국은 그와 반대로 ‘∨’ 모양을 띠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평소 피고인이 사무실에서 한 손으로 스윙 연습을 했다는 위치에서 골프 티칭프로를 통해 스윙을 해본 결과 피고인의 주장과 같이 골프채 헤드가 범행현장에 있던 ‘∨’ 자국에 그 모양 그대로 닿을 수 있는 점도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위와 같이 범행현장 등을 재연한 전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재판부에 제출하였고, 기타 피해자가 본건 허리상해를 원인으로 실손보험금을 청구한 보험회사에 대한 사실조회를 통해 피해자가 실손보험금을 청구할 때 사고원인
을 ‘미끄러지면서 허리를 삐끗했다’고 기재한 추가 증거자료까지 확보하게 되면서, 다행히 피고인은 강간 치상 및 감금죄에 대하여 무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위 사건을 겪으며 사건현장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후 저는 사건의 경위에 대하여 당사자들의 진술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형사사건을 맡은 경우에는 일단 당사자의 진술을 확인한 후 직접 사건이 발생한 현장을 방문해서 관련 당사자들의 진술에 따른 재연을 해보면서 각 진술의 신빙성 여부를 검토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습관의 덕분으로 저는 전직 검찰수사관 출신 법무사가 사건청탁 명목의 현금을 교부받았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사건을 맡았을 때에도 직접 현장을 방문한 후 현금을 전달해 주었다는 전달자의 진술에 따른 동선을 모두 따라가 보면서 그 진술의 신빙성 여부를 직접 확인하였고, 그 과정에서 전달자의 진술에 따르면 물리적으로 도저히 양립불가능한 여러 사실 등을 발견하게 되면서, 피고인이 무죄를 받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사건은 나중에 ‘법무사 억울한 옥살이’라는 제목으로 JTBC 뉴스를 통해 보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수사기관에서 통용되는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격언으로 ‘현장은 범인을 말한다’는 말이 있는데, 변호인으로서 현장의 중요성을 실감한 저로서는 변호인의 입장에서도 ‘현장은 진실을 말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현실적 제약 등으로 변호인이 직접 현장에 나가 사건의 경위를 확인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노력은 분명 같은 시간에 사무실에서 기록을 한 번 더 읽어보는 것 이상의 보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강태욱 변호사

법무법인 민주

강태욱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 글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