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커뮤니티 회원기고
어느 군인을 기억하며

육군 중위 정영규는 1950년 6월 27일 밤 한강인도교 북단에 섰다. 헌병들이 다리를 막고 있었고 피난민들이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육군 본부 소속의 통신장교였다. 사흘 내내 본부의 작전명령문을 전방의 방어선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용산으로 되돌아왔다가 본부가 이미 시흥으로 철수하였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한강을 건너려던 참이었다.


정영규는 새벽 1시가 훨씬 넘도록 트럭 속에서 다리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다리 봉쇄가 풀렸고 피난민들이 우루루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그는 트럭을 운전하여 가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자 트럭을 다리 한켠에 버리고 걷기 시작했다. 동행은 미아리에서부터 따라온 사병 한 명이 전부였다. 마지막 한 개의 교각을 남겨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요란한 폭파음과 함께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굴러가다가 부서져 덜렁거리는 다리 난간을 붙든 채 매달렸다. 몸을 끌어올리려는데 무언가 걸리적거렸다. 동행하던 사병이 그의 발목을 붙들고 매달려 있었다. 장골이었던 그는 초인적 힘을 짜내어 난간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그리곤 기울어진 다리를 기어 올라갔다. 새벽 2시 30분경이었다. 그는 수원까지 내려가서야 육군 본부로 귀대할 수 있었다.

 

한강인도교는 당시 광진교 말고는 서울을 지나는 한강의 남북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다리가 폭파될 시점에 다리 위에 있던 피난민 등은 대략 4천 명 정도로 추산되고 그 중 5백 명 내지 8백 명이 폭파로 죽었다. 인민군 전차는 6월 28일 오전 1시에 미아리 고개를 넘었고 오전 10시쯤에야 다리에 나타났지만, 폭파는 7시간 남짓 전에 이루어졌다. 폭파작전은 실패했다. 다리가 끊기면서 서울 외곽에서 방어선을 펴고 있던 국군 2사단, 3사단, 5사단, 7사단, 수도방위사령부는 후퇴할 길을 잃었고, 파주 전선의 1사단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 총 4만 5천 명의 병력이 퇴로가 막힌 채 흩어졌다. 개전 7일 만에 국군 병력은 9만 8천 명에서 5만 4천 명으로 줄었다. 서울시민 150만 명의 피난길도 막혔다.


정영규의 가족은 피난을 가지 못했다. 라디오에서는 정부가 서울을 사수할 것이며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방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곧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서울 신당동의 동사무소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정영규의 어머니는 날마다 그곳에 불려갔다. 담당자가 하는 질문은 매일 똑같았다.

“할머니, 당신 아들 어디 숨어 있어?”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알면 내가 아들 찾아가지,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난 몰라.”

서울이 수복되기까지 두 사람은 매일 입씨름을 벌였다. 집에 양식이 떨어지자 아내와 큰 누이동생은 함께 미국 원조물자인 밀가루 포대를 양잿물에 삶아 원조물자 표시를 지웠다. 포대 천을 작게 자르고 수를 놓아 애기들의 턱받이를 만들었다. 그걸 시장에 내다 팔아서 양식을 조금 얻으면 죽을 쒀서 식구들의 배를 채웠다. 둘째 누이동생은 무학여중을 다니고 있었다. 학교에 나가면 낮에는 응봉산 아래 한강변 모래사장에 나가 블록을 찍는 노력봉사를 했다. 밤이면 시키는 대로 편지를 써서 선생에게 내야 했다. 수신인은 오빠였다. ‘오빠, 우리는 김일성 장군님의 인민군대가 서울에 온 후 행복하게 살게 되었어요. 오빠, 빨리 이곳으로 돌아와서 우리와 함께 살아요.’ 도대체 그 편지가 어디로 부쳐지는지, 부칠 곳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그런 편지를 매일 한 통씩 써야 했다.


그로부터 30년이 더 지난 1983년에 북한군 공군조종사 이웅평이 미그기를 몰고 귀순하여 왔다. 서울 시내에 요란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는 가운데 라디오에서는 “지금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서울 중부지역에 경계경보를 내립니다”라는 방송이 되풀이됐다. 그 방송을 들은 정영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셋째 아들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애비야, 전쟁 났단다. 아이들 데리고 빨리 피난가라.”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셋째 아들은 공무원이었다. 정영규는 가족이 ‘국방군 가족’으로서 고초를 겪어야 했던 날들의 참혹함을 생각했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셋째 아들은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가야 했고, 그의 목소리는 간절하고도 다급했다.


정영규는 그의 셋째 아들인 내가 어렸을 때 생애 단 한 번 자기가 겪은 전쟁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어머니도 누이동생들도 각각 단 한 번씩 전쟁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전쟁통에 식구들이 살아남은 것을 감사하고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다리가 끊어진 것을 두고 나라를 원망하지 않았고, 아무도 적 치하에 버려진 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어떤 것인지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에게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쟁은 이야기하고 싶은 화젯거리가 아니었다. 정영규는 1998년 대전 현충원에 묻혔다.

 

나는 이제 50년 전에 들은 이야기를 여기에 적는다. 평범한 인간이 평범할 수 없는 사건인 전쟁으로 겪어야 했던 고통의 기록, 이 짤막한 이야기를 남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내 믿음을 적고 싶다. 방송 목소리만 남겨둔 채 서울시민을 버리고 떠나는 대통령은 이젠 없으리라는 믿음을. 그리고 시민들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군이 다리를 폭파하여 끊어 버리는 일도 더는 없으리라는 믿음을. 나는 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국기를 향해 경례할 때마다 우리는 나라가 나를 저버리지 않고 내가 나라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다짐한다고, 나는 믿고 싶다. 국군이 행진하여 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저들과 함께 살고 저들과 함께 죽으리라고 다짐한다고, 나는 믿고 싶다. 이것이 나라와 백성과 군인의 윤리일 것이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정인진 변호사

●법무법인(유한) 바른

 

 

정인진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 글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