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로 좋은 경기 구경하실 수 있어서 참 좋으시겠어요.” 나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은 당황스럽다. 아마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내가 느끼는 기분을 조금쯤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직종을 떠나 ‘거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디 그렇게 녹록하던가. 그러고 보니 나는 다른 방송 못지않게 동하계 올림픽, 아시안게임, 월드컵 등 각 종목별 스포츠 중계를 참 많이 했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별의 별 상황적 추억과 잊지 못할 장면들을 떠들어 보면 책으로 한 권쯤은 넉넉히 나올 법하다.

나는 방송을 하면서 어지간히 망측한 경우가 아니면 ‘되도록 선수나 심판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을 갖고 있는데, 무엇보다 ‘둘의 특징이 항상 가변적 상황과 맞닥뜨리고 있다’는 이해에서다. 물론 정해진 룰 속에서 경기를 치르기는 하나 그들은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극도로 섬세한 예측불가의 상황에 때로는 반사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래서 구경꾼의 입장에서는 스포츠가 재미있고 짜릿하며 감동적인 것 아니겠는가. 각본 없는 드라마다. 그걸 원고 없이 중계하는 캐스터와 해설자는 또 어떻겠는가.

방송 중에 벌어지는 수많은 일 중에 적지 않은 부분이 판정과 관계된 일이다. 앞서 내가 심판을 까지(?) 않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경기 중 발생한 모호한 판정이나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오심은 어찌할 것인가. 심판의 손짓 하나로 경기가 중단되고 경기장이 난장판이 된다. 선수는 울고 감독은 삿대질을 하며 주전자를 걷어찬다. 때로는 주먹다짐까지 벌어지고 상급 국제기구에 상고하기는 기본이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은 4년마다 열리는 대회이기 때문에 한순간의 실족으로 그 4년간의 눈물겨운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또 다음 대회를 기다려야 하
니 심판이나 감독 선수 모두가 매 순간 예민할 수밖에 없다.

경기장에서 심판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런데 이 말에 코웃음을 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심판 당사자들이다. 그들이 자주 자조적으로 하는 푸념이 “만만한 게 심판이야.” 이다. 과거 박지성이나 요즘 손흥민처럼 “오심도 경기의 일부이다.” 라며 성숙, 달관의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안 되면 심판 탓으로 돌리는 선수나 감독이 있기 때문이다. 판정도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100% 완벽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이 일고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어 여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떠오른다. 프랑스의 지단이 결승전에서 이탈리아의 마테라치와 실랑이 끝에 그 유명한 박치기 사건을 일으키며 퇴장을 당했고, 현역 은퇴경기를 불명예스런 퇴장 및 준우승으로 장식해야 했던 그 대회다. 마테라치가 경기 중 지단을 따라다니며 “너네 여동생 창녀지?” 라고 근거 없는 말로 놀렸다던가, 어쨌다던가. 지단은 억울했겠지. 그러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라운드에서 상대를 가격하는 폭력(?)을 행사한 것은 지단이었고 아무도 그 부분에 이견을 달지 않는다. 원인 제공자는 우승컵과 함께 신나게 집에 가고...

독일대회는 우리나라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일화를 남겼다. G조에 프랑스, 토고, 스위스와 함께 속한 한국은 토고전을 승리한 후 프랑스와 어렵사리 무승부를 이룬 후 스위스와의 최종전 결과에 따라 16강 진출 여부가 결정 나는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는 이 경기에서 0:2로 패하면서 16강 진출이 좌절 됐었다. 그런데 당시 스위스의 두 번째 골이 오프사이드 상황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나중에 국제축구연맹(FIFA)의 유권 해석으로 스위스의 득점이 심판의 오심이 아닌 정당한 골로 인정 되었으나 국내에서는 들끓는 비난 여론과 갑론을박으로 한동안 시끄러웠었다.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사실 오프사이드의 제1여건은 공격 선수가 상대 수비수보다 상대진영에 먼저 들어가 있다가 공을 받는 여부가 아니라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 이다. 당시 골로 연결된 스위스 선수의 패스가 그대로 직접 자기편에게 연결된 것이 아니고 우리 수비수 이호의 발을 맞고 골문 앞에 있던 공격수 프라이에게 이어졌고 그걸 받은 프라이가 추가골을 넣었다. 만약에 이호 선수의 몸에 우연히 맞았다면 그건 오프사이드가 된다. 하지만 심판은 우리 수비수 이호의 몸동작을 적극이고 능동적인 수비동작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 오프사이드가 아니고 득점으로 인정한 것이다. 애매하고 어렵다.

당시 중계 해설을 맡았던 신문선 해설위원(현 명지대 교수)은 상황이 벌어지자 확신이 넘치는 말투로 “저것은 스위스의 명백한 득점입니다.” 라고 말했다. 소신은 좋았으나 국내에서는 난리가 났다. 방송국 전화에 불이 나고 홈페이지는 항의글이 홍수를 이루었다. ‘매국노’에, ‘해설자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차라리 양반 축에 속했다. 방송국 게시판에 육두문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결국 신 위원은 대회 중간에 귀국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축구 해설가의 길에서 학교 강단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심판의 판정을 놓고 심판이 아닌 사람에게 벌어진 실화다.

혹자는 판정 시비를 없애기 위해 심판을 아예 기계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고, 일부 경기나 종목에서는 이를 이미 도입하고 있으나 아직 100%가 아닌 보조 수단에 그치고 있다. 결국 사람이 하는 경기는 사람이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셈이다. 글쎄다. 기계나 로봇이 심판을 보는, 로봇 엄파이어, 로봇 레퍼리, 로봇 레인맨, 로봇 저지가 경기를 진행하고 선수에게 경고하며 퇴장을 명할 수 있는 세상이 올까? 그렇게 되면 판정시비가 사라질까? 심심찮게 일어나는 심판 매수 스캔들도 근절될까? 또 그리 되려면 사전에 로봇에게 오밀조밀한 상황과 사례들을 얼마나 많이 입력해야 할까?

내 생각엔 그럼에도 경기장에는 억울하고 분하고 심판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넘쳐날 것이다. 이래저래 어렵다.

김정일 아나운서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