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말, 임지를 남도로 옮기면서 가지고 내려갈 짐을 정리하던 중 어릴 때 썼던 글을 엮어놓은 파일을 발견했다. 유치함을 기대하면서도 은근히 그래도 잘 썼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원고지에 적어넣은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어렸을 때는 또래 친구들보다 긴 글을 제법 지어낸다는 칭찬을 들었던지라 글을 꽤나 잘 쓴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살짝 지은 미소와 함께 글이라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나의 경험을 돌아보았다.

글에 대한 내 스스로의 아주 후한 평가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은 법이라 좋은 글 솜씨를 가진 친구들이 많았던 터였다. 하지만 그때 감탄했던 글을 지금 돌아보면 사춘기 특유의 현학 혹은 밑도 끝도 없는 염세가 작용하는 어려운 글이었다. 이름도 어려운 철학자가 쓴 난해한 글을 논술학원에서 배운 대로 그대로 적거나 아니면 소위 ‘있어보이는’ 개념어들이 난무하는 글이었으니 말이다. 그 때는 그렇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좋은 글은 쓰는 이가 아닌 읽는 이가 만족하는 글이었다.

글에 대한 또 다른 기억조각은 대학생 때를 돌아보면서 떠올랐다. 단과대 신문사에 수습기자로 입사하여 글쟁이가 된 나는 친구들이 젊은이의 열혈로 힘차게 써내려간 날것의 글을 보면서 부러움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또한 이 무렵 쓰기 시작한 연애편지, 이것도 아주 재미있었다. ‘밤에 쓴 연애편지는 절대 다음날 날이 밝고는 읽어보지 말라’는 이야기대로 괜한 부끄러움에 다시 쓰기도 여러 번이었다. 감정의 군더더기 없이 팩트만을 전달하는 보도면 기사에서 단어 하나 하나에 감정이 철철 넘치는 연애편지까지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은 글을 접하고 좋은 글에 대해 생각했다. 좋은 글은 감정을 조절하여 냉철함 속에 읽는 이의 감성을 건드릴 수 있는 호소력 있는 글이었다.

글에 대한 기억은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여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극히 짧은 시간에 수많은 쟁점에 대해 모두 건드리면서도 논리적으로 완성된 글을 써야 하는 미션은 몇 번의 시험을 치면서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글을 쓰는 것도, 법학공부도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법문서의 작성’ 수업과 ‘가인법정변론경연대회’ 참가는 즐거운 도전이 되었다. 쟁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위한 글, 쟁점에 대해 잘 아는 상대방에게 내 편이 되어달라고 설득하는 글, 객관적으로 사안의 쟁점을 짚어내고 예상되는 결론을 진솔하게 이끌어내는 글 등 쟁점의 방관자가 아니라 스스로 한 귀퉁이를 잡는 사람이 되어 긴 호흡과 함께 즐겁게 쓰니 문장 하나 하나의 맛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내가 내 글의 방관자가 아니라 글이 곧 내 얼굴이 되도록 체화하지 않는다면 좋은 작품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글을 정말 잘 쓰고 싶다.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법 문외한이 읽어도 간단히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저렴한 통속의 글이 아닌, 그리고 너무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읽는 이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그런 멋있는 글 말이다. 그러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결국 글을 쓰는 자의 깊은 통찰력과 지혜, 이를 이끌어내고 맛깔나게 버무려낼 수 있는 훌륭한 성품이 먼저라는 것이 학창시절이 내게 준 교훈이다. 읽는 이를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며 혼신의 힘으로 적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통찰력, 지혜와 바른 성품은 꼼수들을 익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제 겨우 법률가로서의 첫 발을 뗀 지금, 법률가로서 쓰게 될 나의 새로운 얼굴, 나의 글을 생각한다. 그리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한 나의 앞으로의 길을 생각한다. 글을 잘 쓰고 싶다. 그리고 글을 잘 쓸 수 있는 바탕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바람과 다짐 속에 생그러웠던 남도의 봄은 그렇게 뜨거운 여름으로 달려간다.

원우현 공익법무관 ●광주지방교정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