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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인터뷰

호국의 달 6월이 지나갔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 현충일 추념사에서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다”는 발언에 대해 베트남 정부는 주한국 베트남 대사관을 통해 공식 항의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 한국과 베트남이 겪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와 상생을 위해 노력하고자 2016. 4. 발족한 한베평화재단(이사장 강우일 주교*)도 성명서를 내고,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에 대한 국가 예우는 당연하지만, 베트남 전쟁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과 경제발전 논리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고, 평화와 외교, 역사적 관점에서 베트남 전쟁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베트남전에서 5천여 명의 꽃다운 한국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1만 명의 부상자와 2만 명의 고엽제 후유증 환자가 지금까지 고통에 신음하고 있지만, 반면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학살한 민간인 희생자가 무려 9천여 명에 이른다. 이러한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기억도 잊지 말아야 하며, 한국-베트남 수교 25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과 베트남의 전쟁경험이 역설적으로 양국 간 평화 외교를 가능케 하고, 한국이 국제사회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나서서 국가차원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진상규명 및 피해자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함이 바람직하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베트남에서 현대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2016년 설립된 한베평화재단을 비롯하여 여러 베트남 관련 평화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해온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구수정 님과 한국과 베트남의 평화, 베트남 민간인 학살 등 과거 청산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http://kovietpeace.org

 

 

Q 선생님께서는 한국 최초로 베트남 현대사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왜 베트남 현대사를 공부할 생각을 하셨나요? 한국인이 베트남에서 공부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제가 베트남에 공부하러 간 것은 93년 겨울이에요. 제가 80년대 학번이라서 당시 베트남 역사, 1960년대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았어요. 저는『사이공의 흰 옷』,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라는 두 권의 베트남 소설을 읽고 베트남에 대한 관심이 생겼어요.
제가 베트남을 갔을 당시는 외국인 유학이 흔치 않아서 베트남 정부의 유학 관련 규정, 절차, 시스템 등이 몹시 미비했어요. 제 한국 전공이 사회복지학인데 석사과정 입학을 하고자 했을 때 베트남 역사에 대한 보충학습을 6개월 받도록 했어요. 베트남 학생들과 동일한 시험을 보고,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서 외국인임에도 점수가 제일 높은 수석이 되어 입학을 했죠. 2년 동안 교과목을 모두 좋은 성적으로 이수하고, 수료했다고 생각했고 석사논문 발표를 위해 서류를 준비하는 도중 입학자체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이 문제를 베트남 교육부에 문의도 하고 건의도 하고, 시험성적 및 합격점, 서류 등을 만들어서 하노이에 있는 교육부에 전달해도 아무런 답이 없었고 8번 정도 하노이에 가서 이런 문제를 해결했어요. 93년 말에 가서 95년부터 석사과정을 시작했는데, 97년에도 입학 자체가 안 되었던 것을 발견한 거죠. 제가 어쨌든 대학입학 성적도 있고 합격한 사실도 있고, 각 교과목의 이수 학점도 있어서 교육부와 지루하게 협상을 하고 이를 99년에서야 해결이 되어 박사과정 입학이 되었어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석사논문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다음 걸림돌은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논문주제를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제 석사논문 주제가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 연구”였는데 위 논문주제가 양국 관계에 예민한 주제라는 이유로 허가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를 많이 아끼던 교수님들께서는 주제만 바꾸면 석사학위의 어려움이 없을 것이므로 한국베트남 관계사로 바꾸라 혹은 어떤 분은 직접 써줄 수도 있다고 제안도 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원래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문제에 관심이 있었고 이 때문에 베트남에 온 것이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이 주제로 허가를 받아 논문을 쓰게 되었어요. 그런데 박사학위는 석사학위에서 너무 고생한 것 같아서 한국 베트남 관계사로 주제를 바꾸었죠. 박사학위 논문은 “베트남 전쟁을 전후로 한 한국 베트남 관계”라는 주제였어요. 최종 통과된 것이 대략 2008년인데 그 사이에 아주 큰일들을 겪게 되었지요.


Q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어떻게 알게 되신 건가요? 

베트남에서는 자료접근이 절대적으로 어려웠어요. 90년대에도 한국군 참전에 대한 한국 자료는 거의 없고 베트남 관련 자료는 거의 미국 자료에 의존해서 많이 썼죠. 저는 베트남에서 공부한 사람이니 베트남 자료에 기해 좀 더 객관적 시각에서 한국 자료나 미국 자료뿐만 아니라 베트남 자료도 종합해서 한국군의 참전문제를 바라보고자 했어요. 그런데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라서 외국인의 자료접근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죠. 예를 들어 베트남의 국립문서 보관소에도 접근이 안 되고 베트남 국방부는 전혀 불가능하고, 참전이 외교문제이므로 외교부 자료에도 접근하고자 했으나 외국인에 대한 자료접근이 허용되지 않아 백방으로 노력하다 지인을 통해 간신히 관련 자료를 공식적 경로가 아닌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었어요. 베트남 외무부 산하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에는 지금도 외국인의 접근은 힘들어요. 제가 98년에 석사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의 범주를 꽤 넓게 잡아 한국군 관련 자료라면 뭐든지 구했어요. 그런데 제 손에 들어온 자료는 ‘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자료였어요. 이 자료가 운명처럼 저에게 다가 왔죠. 이 자료는 너무 잔혹한 내용이 담겨져 있어서 처음에는 그 내용에 대해 반신반의 했어요. 저는 당시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했을 것이라 상상해본 적도 없었어요. 전혀 몰랐지요.

 

 

Q 사실 예민한 문제일 수 있는데, 선생님께서 석사학위 주제를 받고 2000년경 한겨레를 통해 한국에 최초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알려 보도하게 되는 과정에서 큰일을 겪으셨잖아요. 간단히 당시 상황을 좀 알려주세요.

2000년 6월 27일 한겨레 신문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기사가 나오고 2,400명의 베트남 고엽제전우회 회원 분들이 한겨레 신문사에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해서 신문사의 윤전기, 사무 집기, 16만 장에 이르는 서류를 불태우고, 간부들도 감금하고, 한겨레 신문사에 송전을 차단하여 업무를 중단시켰어요. 그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두 대의 주차된 차를 한 대는 전복시키고 한 대는 방화하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어요. 당시 저는 베트남에 있었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저희 집 골목이 온통 빨갛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희 집은 단독주택이었는데 골목 담벼락마다 빨갱이라는 등 제 욕설을 스프레이로 뿌려놓고 집 앞에 염산통을 가져다 둘 정도였대요.

 

Q 베트남에서 귀국하기 어려운 상황이셨을 텐데요.

당시 어지간하면 귀국을 안 했을 텐데 저를 어려서부터 키워주신 할머니께서 위독하셔서 임종 전에 할머니를 뵈려고 귀국을 감행했어요. 그런데 한겨레 신문사에서 저에 대한 신변보호요청을 해서 경찰병력들이 차벽을 세워주고 딱 5분만 보고 나오라는 것이어서 30분 정도밖에 뵙지 못했어요. 제가 신변보호요청을 하면 병력배치에 따른 국가예산을 쓰는 건데 한국에서는 위험한 상황에서 국가예산을 낭비하니 빨리 떠나라고 하고, 베트남의 한국 공관에서는 위험하니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국제미아가 된 느낌이었어요. 당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저를 보호해 주겠다고 해서 조금 들어가 있었죠.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오래 있지는 못했고 한 달 정도 후에 베트남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Q 베트남에 돌아가서도 힘드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어요?

일단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어요. 99년 전까지는 기업 일을 많이 했지만, 민간인 학살문제를 2000년에 처음 기사로 쓰면서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없었어요. 제가 당시는 베트남에 진출한 대기업들을 도와주면서 얻은 수입으로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어서, 베트남에서 6층짜리 주택을 임대해 한국에서 오신 분들을 지원도 하고 도와드렸는데, 나중에는 임대료를 못 내다가 결국 전기, 수도가 다 끊어지고 집에서 쫓겨나는 경험을 했죠.

베트남에는 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기업들의 진출도 많았으나 한국 노조들이 베트남 노조들과 교류를 시작하는 것이 보였어요. 노조원들은 당연히 기업인들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제가 큰 집을 임대해서 이분들을 재우기도 하고 도와드렸어요. 그 이유는 제 부채의식 때문인 것 같아요. 당시 80년대 학번들은 위장취업으로 공장을 많이 갔었고 저도 노동운동에 대한 꿈이 있었는데, 2년 정도 뒤에 소위 학출 신분이 탄로나서 해고가 되었어요. 그런데 해고 이후 복직 투쟁을 하는데 혼자 하는 싸움이다 보니 출근투쟁 등 어려움이 많아 3일 만에 이를 포기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노동운동을 못 했다는 것에 대한 부채감과 거창한 포부를 가지고 갔으나 2년 만에 해고당하고 복귀 못 한 것에 대한 자괴감이 제 마음에 쌓여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일하던 공장은 수원에 있는데, 지금도 1호선을 탈 때면 인천, 구로행 열차는 타지만, 수원행 열차는 약속시간이 늦어도 못 타겠어요.
아무튼 그러던 중 베트남의 교수님이 집을 공짜로 빌려주기도 하고, 제 사연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제가 받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분들이 성금을 보내주기도 하고, 한국에서 성금이 오기도 하여 일정시간 연명을 하였죠.

 

Q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꽤 다양한 한국과 베트남과의 교류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오셨고 베트남에서도 인정을 받고 계신데 어떤 활동들이었는지 소개해 주세요.

2000년에 시민단체 14개가 모여서 가칭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결성이 되었어요. 여기서 참여했던 단체들이 한국사회 내에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함과 동시에 베트남에서 각자 사업을 벌였어요. 예를 들어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같은 경우, 베트남 중부 한국군 민간인학살지역에서 무료 진료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베트남 무료 진료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만든 단체가 ‘베트남 평화의료연대’예요. 시민단체 ‘나와 우리’는 ‘한베청년평화캠프’라는 사업을 하는데, 학살마을에 위령비, 집단묘지조성, 교량건설, 길 닦기, 학교건설 등의 여러 사업을 했어요. 저는 이런 단체들을 돕고 인허가, 통번역 등 여러 현지 코디네이션을 개인 차원에서 오랫동안 해왔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10년쯤 지나니 이러한 사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추진해오던 사업의 성격이 바뀌거나 동력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고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처럼 연대체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곳이 사라지기도 했어요. 10여 년간 사업을 하면서 베트남전 학살현장을 돌아다녀보니 민간 차원에서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들의 삶이 그다지 개선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기에, 피해지원사업에 대한 고민이 커지게 되었어요. 이러한 지원만으로는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사회적 기업이나 공정무역을 고민하게 되어 기업의 이윤을 피해지역에 환원시키려는 고민 끝에 공정무역기업인 ‘아시아 공정무역 네트워크’라는 한국기업을 만들고 베트남에는 ‘아맙(AMAP)’이란 베트남 사회적 기업을 만든 것이죠. 제가 아시아공정무역 네트워크의 창업자 중의 하나이긴 하나 이강덕 대표가 한국에 계시고, 저는 베트남에서 ‘아맙’의 운영책임을 맡았던 것이고요. 기존 진료사업, 평화캠프, 피해자 위령제 지원사업 등을 이어갔고 새롭게 베트남과의 공정무역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캐쉬넛을 아시아공정무역 네트워크가 수입하는데 저희는 베트남에서 아이템을 개발하고 생산자 조합을 관리하고 베트남 농민 분들에 대한 수출지원을 한 것이죠. 베트남에서는 공정무역 홍차, 커피, 초콜릿 등이 있는데 굉장히 질도 좋고 마루 초콜릿은 세계 초콜릿 대회에서 2위를 할 정도로 품질이 좋고, 계피도 있어요.
저희가 베트남과 공정무역을 한 최초의 업체였고, 그 이후에도 품목을 다양화하여 커피, 캐쉬넛 이외에도 다변화하는 데 기여를 하기도 했어요. 그 외도 베트남과의 공정여행을 기획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베트남 평화기행’이에요.

 

Q 베트남 평화기행이 일본의 피스보트(Peace Boat)와도 비슷한 점이 있고 피스보트가 한국군 민간인 학살문제를 알게 된 경위와도 관련이 있다고 들었는데 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세요.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이 한국인인 우리가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알게 된 것도 일본이 운영하던 피스보트의 평화기행을 통해서예요. 일본은 1982년에 과거 일본의 침략을 진출이라고 표현하는 역사교과서 왜곡을 하였고 여기에 한국과 중국이 큰 반발을 하면서 역사교과서 파동을 겪었죠.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일본의 청년세대는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의 교과서가 틀렸을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어 일본 청년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직접 찾아가 대면하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자고 만든 것이 피스보트이고 이는 1983년에 만들어지게 되었어요. 지금은 이 피스보트의 외연이 확장되어 환경이나 탈핵 출범부터 2000년 초반까지 일본 과거 점령지를 찾아다녔는데, 1년에 3회 정도 출항을 하고 5개월간 다녔다고 해요. 배가 커서 적게는 500~600명에서 많게는 700~800명이 승선합니다. 지금까지 수만 명의 일본 시민들이 피스보트를 탔을 거고 일본의 안보법과 재무장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대부분이 피스보트 출신이라고 해요.
제가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자료를 98년에 입수했는데 일본의 보트에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초대해서 같이 다낭항에 내려서 찾아갔던 곳이 한국군 민간인 학살지역이었다고 해요. 당시 한국의 작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고, 제가 2000년 초반 평화기행을 갔을 때도 대부분의 한국분들은 이러한 사실에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예민하고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시면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 일본 친구들이 한국 작가들을 데리고 베트남 학살지역에 갔을 때 위령비를 보면서 그 한국 작가분들이 처음 받았을 충격은 상상하기 어려울 거예요. 피스보트는 낮에는 현장 답사를 하고 밤에는 배로 모여 섹션별로 토론을 하는데, 이 한국 작가들이 들어간 주제가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었대요. 한국 작가들은 세상에 처음 듣는 이야기도 토론을 했어야 했고 일본 친구들에게는 짜증도 나고 못 믿겠다고 하고, 일본 친구들은 왜 한국인들은 일본인이 역사를 모른다고 하면서 정작 너희의 역사는 외면을 하느냐고 하는 과정에서 계속 큰 갈등이 있어서 일부 작가들은 그냥 피스보트에서 내리게 되었다고 해요. 이렇게 중도 이탈한 작가들이 내린 곳이 다낭이죠. 당시는 외국인들이 거의 없던 다낭부터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호치민시까지 오신 한국 작가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들은 거의 믿지 않으면서 그 사실을 이야기 해 주셨고 저는 저대로 제가 논문을 쓰기 위해 입수한 자료를 보여드리면서 어쩌면 이게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같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저희들은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일본사람 손에 끌려가지 말고, 우리가 직접 진실을 찾아보자는 일종의 도원결의를 하게 되었어요. 그런 취지에서 직접 저희가 진실을 찾아보기 위해 시민단체 ‘나와 우리’를 만들게 되었죠. ‘나와 우리’를 중심으로 제가 도와 베트남 평화기행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어요. 이런 점에서 저희가 피스보트처럼 재원은 없어서 큰 규모는 아니지만, 2000년부터 어떤 형태로든 베트남 민간인 학살지역을 찾아가고 20년 가까이 이러한 일을 이어오고 있고, 우리도 이제는 1,000여 명이 넘는 한국 분들이 가게 된 것이네요.

일본의 피스보트는 민간인 학살지역을 많이 가고, 빈호아 마을도 저희보다 훨씬 먼저 들어가서 피스보트가 일본정부에 제안하여 최초의 초등학교를 일본 ODA자금으로 건립했어요. 한국 작가들이 다낭에서 들어간 마을인 투이보 마을의 경우, 준꼬 학교가 세워졌는데 이 사연이 무척 의미가 있어요. 1993년 평범한 일본 여대생이었던 준꼬는 피스보트를 타게 되었는데 다낭에 기착해 투이보 마을에서 응우옌 티니라는 할머니를 만났어요. 이 할머니는 제주 4.3.의 무명천 할머니처럼 한국군 총탄에 의해 턱이 날아가서 무명천으로 턱을 계속 감고 계셨죠. 응우옌 티니 할머니는 앉아서는 물 한 잔, 밥 한 숟갈도 먹을 수 없고 누워 있어야 했어요. 당시 준꼬는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의 맨발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학교를 다니지 않고 피스보트를 따라다니는 이유가 학교가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알았어요. 시민단체나 운동권도 아닌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던 준꼬는 일본에 돌아가서도 혼자 거리에서 매일 모금운동을 하다 안타깝게 교통사고로 죽게 돼요. 무남독녀였던 딸을 잃어버린 준꼬의 부모님은 차마 딸의 방을 치우지 못하고 1년 만에 준꼬의 일기장을 발견했는데, 투이보마을의 사연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거리에서 모금운동을 했던 딸의 뜻을 알게되어 그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투이보 마을에 학교를 짓게 되죠.
 

Q 이번에 출범한 한베평화재단에서는 언론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던 ‘위안부’ 소녀상과 비견되는 ‘베트남 피에타’상 설치 등 여러 활동을 벌이고 계신데 앞으로 한베평화재단의 활동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이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베트남 피에타’상은 베트남전 종전 기념일인 4월 30일을 즈음하여 올해를 평화의 원년으로 삼고 동아시아 평화의 염원을 담아 한베평화재단의 첫걸음을 내딛고자 추진한 것으로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을 제작한 부부작가 김서경ㆍ김운성 씨가 제작한 것이지요. ‘베트남 피에타’상은 베트남 전쟁에 의해 희생당한 민간인들, 특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음에 직면한 아이들을 애도하고 전쟁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하기 위해 만들어졌고요.
이제는 우리나라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문제를 직시할 때이고 균형 잡힌 역사인식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베트남에 갈 때마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저보고 괜찮냐고 안부를 묻는데 정작 우리 국민은 이에 너무 무감하다는 것에 놀라고, 이는 평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한베평화재단은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계승하는 것이고, 비단 베트남 과거사 이슈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전쟁위기가 가장 큰 곳 중의 하나인 한반도에 평화담론을 만드는 폭넓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정리 : 이지은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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