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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한 진실 구해내기

얼마 전 모교의 교지신문부 소속 어린 후배들이 인터뷰를 다녀갔다. 10대 소녀들은 진지한 눈망울로 내게 질문을 쏟아냈고, 이를 계기로 나는 길지 않은 나의 변호사 생활을 사뭇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질문 중에 ‘변호사로서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니, ‘내가 무죄라고 믿는 피고인이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인 듯했다. 그래서 지면을 빌려 여느 드라마보다 더욱 흥미진진했던, 보람 있었던 사건 하나를 공유해 보고자 한다. 

 

로펌에서 고용변호사로 일하면서 담당했던 사건이었는데, 피고인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이 된 상태였다. 1심 판결에서 인정한 범죄사실은, 피고인이 고소인의 회사인 A회사 소유의 ㉮레미콘공장(건물 및 토지 일체)과 ㉯레미콘공장(건물 및 토지 일체)을 B회사 소유로 이전하여 횡령하였고, 또한 고소인의 회사인 B회사 소유 자금을 피고인이 설립한 C회사의 운영자금으로 임의 사용하여 횡령하였으며, 고소인에게 맞고소를 하여 무고하였다는 것이었다. 즉, 피고인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죄 3건과 무고죄의 실체적 경합범이었고, 횡령죄로 취득한 범죄 수익은 합계 31억여 원에 이르렀다. 

 

우선 증거기록과 공판기록을 검토해보니, 피고인은 초동 수사단계부터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해왔지만,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검사의 질문에 답변을 잘하지 못하였고 앞뒤 진술이 모순되는 등, 뭔가 감추고 있는 범죄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1심 공판에서 제출된 의견서 등은 복잡하고 난해한 사건의 쟁점을 정리하여 피고인의 무죄를 도운 것이 아니라, 수사단계보다도 더욱 사건을 이해할 수 없도록 헝클어 놓았고, 수십 개의 증거들은 구체적으로 인용되거나 설명되지 않은 채, 그냥 순번을 적어 뭉텅이로 제출되어 있을 뿐이었다. 1심 공판에서 제출된 의견서와 증거들은 도저히 무죄를 다투는 피고인과 변호인이 제출한 의견서와 증거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고, 따라서 1심 공판기록을 꼼꼼히 살펴보아도,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핵심 쟁점과 증거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서둘러 핵심 질문사항들만 정리한 채, 기록을 모두 들고 구치소로 접견을 갔다. 피고인의 첫인상은 눈빛이 선했고, 2시간 넘는 접견을 마치고 나니, 내 나름 피고인이 무죄라는 심증이 들었다. 그 후 피고인의 가족들과 지인들은 물론 피고인이 운영해 온 회사 직원들을 만나고, 수많은 증거들을 새로 받아 정리하면서 피고인이 무죄라는 심증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고소인과 검사가 주장한 공소사실은 “고소인이 A회사와 B회사의 실제 소유주이고, 피고인을 명의상의 월급사장(일명 바지사장)으로 고용하여 회사를 운영하게 하였는데, 피고인이 고소인 몰래 A회사 소유로 등기된 ㉮ 레미콘공장과 ㉯레미콘공장을 B회사 소유로 등기이전 하여 각각 횡령하였고, 고소인 몰래 B회사 소유의 자금을 피고인이 설립한 C회사의 운영자금으로 사용하여 횡령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고인이 주장하는 진실은 “피고인과 고소인은, 10여 년 전 고소인이 호텔을 신축하는 과정에 발생한 여러 문제들을 피고인이 해결해 주면서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당시 피고인은 A회사를 설립하여 골재채취업을 운영 중에 있었다. 피고인은 경매로 나와 있는 레미콘공장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싶었으나 자금이 없어 고민하던 중, 당시 상당한 재력가였던 고소인에게 도움을 청하여 합계 약 20억 원을 빌렸고, ㉮레미콘공장과 ㉯레미콘공장을 A회사 명의로 낙찰 받았다. 피고인은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12억 원 상당을 고소인에게 즉시 변제하였고, 레미콘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약 3년 후에 나머지 차용금을 모두 변제하였다. 나아가 그즈음부터 고소인의 사업이 급격히 쇠락하여 고소인의 자금 사정이 나빠졌는데, 피고인은 자신이 힘들 때 도와주었던 고소인의 은혜를 잊지 않고, 이후 약 5년 동안 합계 27억여 원을 고소인에게 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소인은 “A회사와 B회사가 모두 고소인의 회사였기에, 위 합계 27억 원은 수익으로 가져간 것일 뿐, 피고인으로부터 빌린 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1심이 부여한 강력한 유죄의 심증을 뒤집을 수 있는 핵심 증거는, 역설적이게도 피고인이 과거 고소를 당했던 기록에서 발견되었다. 상술하면, 피고인과 A회사를 함께 설립했던 동업자 S가 피고인과 관계가 멀어지고 오해가 생기면서 피고인을 고소하였는데(무혐의 종결), 해당 고소사건의 기록에는 S가 피고인과 함께 A회사를 설립하게 된 배경에 관하여 상세하게 정리한 진술서가 남아 있었다. 즉, A회사가 고소인이 설립한 고소인의 회사라는 1심 판결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핵심 증거가 현출된 것이었다. 그 외에도 항소심에서 4명을 증인으로 추가 신문하였고, 약 10년 동안의 은행거래내역, 재무제표, 은행대출관련 서류 등 방대한 양의 증거가 추가로 제출되었다. 항소이유서 50여 쪽, 항소이유보충서(1) 130여 쪽, 항소이유보충서(2) 40여 쪽, 수차례의 변호인의견서와 증거설명서 등 사실관계와 증거를 설명하고 정리한 서면의 양만도 수백 쪽에 이르렀고, 가지번호까지 포함하면 항소심에서만 새로 제출한 증거(서증)가 300개가 넘었다.

 

여느 사건과 달리 이 사건은 형사 유죄판결이 유지될 경우, 피고인이 10여 년 동안 일궈 온 A회사와 B회사의 소유권을 고소인에게 뺏기게 되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과정과는 달리, 1심에서 이미 유죄를 선고받은 피고인이 무죄를 선고받을 확률은 절반이 넘지 않는다고 예상되었다. 

 

그러나 피고인은 구속만기 8개월을 6일 앞둔 날 기적적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나는 진실이 침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 떠올려도 미소가 머금어지는 사건이다.

변호사 박세아

사법시험 제51회(사법연수원 4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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