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변호사, 그들로부터 도구적 필요가 아니라 신뢰에 의해 선택받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것은 나의 ‘초심’이었다. 그런데 의뢰인의 신뢰는 아픔을 공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직업 활동을 통해 그들의 신뢰를 얻겠다는 의지 자체가 오만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순진해 보이는 그 아주머니가 회의 테이블에 올려놓은 서류는 공소장이었다. 죄명은 사기 미수, 소송사기죄였다. 아주머니가 있지도 않은 대여금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그 돈을 편취하려 하였다는 것이었다. 수사기록 검토를 마치고 무죄 판결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호기롭게도 그 아주머니와 남편 앞에서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고 자신했고, 내 약속대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 아주머니 부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신뢰와 애정이 묻어났다. 이 맛에 변호사를 하는 거다!

남편이 고향 동생을 수십 년 만에 만났고, 오지랖 넓은 남편은 살림살이 어려운 고향 동생을 챙겼고, 여러 차례 돈도 빌려줬다. 그런데 나중에 관계가 틀어지면서, 돈도 못 받게 되었고, 현금으로 돈을 건네서 증빙자료 하나 없는 아주머니는 화가 나서 민사소송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변호사들이라면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식상한’ 스토리였지만,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 변호사로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슬픔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럴수록 그들은 나를 신뢰했고, 나는 그들과의 공감을 즐겼다.

2심에 들어가서도 별다른 증거관계상 변화는 없었고, 공판 절차는 차분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검찰은 무죄 판결에 대해 당연히 항소를 했을 것이고, 항소심은 형식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절차로 여겨졌다. 하지만 판결 선고일 아침 아주머니가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판결을 받고 법정 뒤로 끌려가야만 했던 아주머니의 심정은 정말 참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변호인인 내가 그 순간 느꼈던 충격과 좌절은 아주머니의 심정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2심 판결문은 그 아주머니가 거짓말을 하여 소송을 한 것이라는 결론을 정결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난감했다. 1심에서 유죄가 나왔다면 법원이 배척하고 있는 증거들에 초점을 맞추어 변론하면 되지만, 상고심에서 어떻게 사실오인을 변론한단 말인가? 구치소에서 만난 아주머니의 눈빛에는 공포와 불안감, 나에 대한 원망과 불신이 뒤섞여 있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몇 달 전 아주머니 앞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주겠다고 자신감 있게 말했던 호기가 없었다. 법리적 문제만이 대법원 상고심의 심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원론적인 말을 그냥 떠들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정성을 다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소송사기죄에 대한 법리오해, 채증법칙 위배라는 상고이유를 준비하여 접수하였다. 2심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있었지만,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전혀 없었다. 어느 대한민국 변호사가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자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드라마틱하게도 상고심에서 파기환송 판결이 내려졌다. 기대치 않은 상황에 다시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었고, 석방된 아주머니와 남편을 의기양양하게 사무실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이들은 기뻐하지 않았고, 내가 기대했던 신뢰의 눈길을 다시 주지 않았다. 오로지 남아 있는 파기환송심에 대한 불안감만을 가지고 있었다. 파기환송심 판결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아주머니 부부는 더 이상 나에게 따뜻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나의 길고 긴 롤러코스터의 한 타임이 숨가쁘게 마무리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들은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그들은 왜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잘못된 판결 때문에 고생한 것을 가지고 왜 나에게 불신의 눈빛을 주는가, 불만이 생겼다. 반면 아주머니로부터 소정의 수임료를 받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었는데, 왜 나는 계약서에도 없는 의뢰인의 신뢰와 애정까지 기대하는 것일까, 의뢰인의 신뢰를 얻겠다는 나의 ‘초심’은 욕심이고 오만이 아닐까, 의뢰인이 끝까지 나를 믿고 사건을 맡긴 것이 신뢰이지 그 이상의 어떤 신뢰를 기대한단 말인가, 사건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나의 변호사 생활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자문하게 되었다.

어차피 나는 롤러코스터의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다. 내가 그 방향과 속도를 정할 수가 없다. 롤러코스터를 타기 위해 흥분된 마음으로 기꺼이 1시간 정도 줄을 설 수 있는 것은, 그 롤러코스터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초심’을 내려놓고, 의뢰인의 아픔을 내가 함께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들은 나에게 유능하고 성실한 변호사를 기대하는 것이지,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할 친구를 기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의뢰인들에게 다소 무관심한 듯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일하는 선배들의 내공이 번쩍거리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느껴보게 된다.

김행석 변호사 ●법무법인(유한) 정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