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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보았다. 셰익스피어 <오델로>의 선과 악

 

 

그해 여왕이 죽었다. 지나간 때(往年)가 좋았다는 말이 돌았다. 질병도 함께 돌았다. 우중충한 나라꼴에 극장은 폐쇄되었다가 재개되기를 반복했다. 인기가 좋던 희극(喜劇)과 사극(史劇)들도 사라져 갔다. 평소 여왕은 연극에 관대한 편이었다. 전에는 전염병이 돌아도 극장이 운영되곤 했었다.
본래 여왕은 야망이 큰 남자가 싫었다. 그는 권력을 나누는 대신, 젊고 유능한 대신을 키웠다. 여왕은 철저하게 권력을 독점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에게 포악하거나 냉혹하지는 않았다. 그때엔 그나마 국민들이 내 식대로 살면서 인생을 소비할 수 있었다. 여왕은 사람들이 먹고 살도록 해 주었고 여가시간에 여러 가지를 즐기도록 했다. 음악과 연극이 흥행했고 승마, 사냥 같은 스포츠 거리도 유행했던 때였다.


셰익스피어는 때를 잘 만났다고 전해진다. 작가이자 연출가의 전성시대가 시대적으로 연극(극장) 예술의 황금기와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여왕 시대에 셰익스피어는 일찍부터 런던 극단에 진출하면서 꿈을 이루어갔다. 그의 흥미로운 연극들은 여왕의 귀에도 들어갔고 극단은 궁정과 귀족의 후원을 받았다. 셰익스피어는 꽤 괜찮은 연출가로 성장했다. 그의 연극에서 인물들은 개방적이고 유쾌하고 활달하며 때론 방종하거나 주책스러웠다. “런던의 공기는 자유를 준다”는 말이 딱 맞던 시대의 과감한 연극이었다.
그런데, 그 즈음 여왕이 죽었다. 후임 왕이 등극했고 그의 관대한 후원 아래 극장들은 재개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셰익스피어는 비극(悲劇)을 쓰게 된다.『로미오와 줄리엣』, 『햄릿』을 몇 번 고쳐 무대에 올리곤 했던 그는, 마흔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비극 연작(『오셀로』, 『리어왕』, 『맥베스』)을 써 내려간다. 그의 작품에는 숙명에 던져진 인간들이 등장하고 도무지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비통’, ‘침울’, ‘절망’, ‘충격’, ‘염세’, ‘허무’ 같은 것들이 떠돌아 다녔다.
그 중에서도 <오셀로>는 독특한 작품이다. 얼핏 의처증에서 비롯한 명예살인이거나 또 하나의 가정 비극(悲劇)일 수 있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착하다(善)”, “나쁘다(惡)”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전신(戰神) 오셀로는 인종, 계층, 출신 같은 차별에도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 온 명예로운 사람이다. 그는 공동체의 명령에 살고 죽고자 했던 용감한 군인이었고, 그로써 자신의 가치가 온전히 지켜진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그는 베니스 공화국에서 높은 지위를 인정받았고 부유해졌으며 원로원 귀족 가문의 딸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는 선했고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이제 누구나 바라는 바대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 될 것이다.
그런데 선인(善人) 오셀로는 우연히 어떤 악인(惡人, 이아고)의 꾐에 빠진다. 인과관계는 없다. 악을 만난 건 우연이지만, 필연적으로 선은 파멸한다. 흔히 아는 권선징악이나 복수의 카타르시스도 없다. 셰익스피어에 따르면, 선한 사람은 악한 사람을 만나 파멸한다.
악당(惡人) 이아고는 악마다. 흔히 보편적인 인간에게 있다는 ‘선한’ 면, ‘악한’ 면이 공존하는 인간이 아니다. 괴롭힘의 희열을 느낄 줄 아는 악마다. 그는 자신의 그물(NET)에 들어온 먹이를 마비시켜 서서히 떼어 먹는 거미다. 상대의 온몸을 묶고 마비시키면서 지속적인 고통을 준다. 파멸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악행으로 아픔을 가한다. 악은 상대의 고통과 억울함에 무관심하다. 어쩌면 그는 악을 악(惡)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인가!
반면 오셀로는 선하다. 그는 바른 신념을 가지고 성실히 살았다. 혹은 좋은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어떤 연유인지 악의 미움을 받고 악에 파멸한다. 오셀로를 두고, 혹자들은 잠재된 열등감이 폭발했다고 하고 질투심(Green Eyed Monster)에 눈멀었다고 하지만, 실은 그가 고결하기에 모든 일이 벌어진 셈이었다. 결국 그는 선하기 때문에 악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아내와 스스로를 죽였다.
그는 아내에게 “당신은 죽어야 하오. 사랑한 죄로 죽어야 하오.”라고 말한다. 손수건을 해명하려 한 데스데모나가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야 하다니요? 그런 죽음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끝까지 설득하려 했지만 오셀로의 확신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신념과 가치는 선한 것이기에 절대 불변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것을 위배한 아내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받지 못했다. 어쩌면 정직과 선에 대한 강한 확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기극이 밝혀지자 불현듯 스스로에게 불신과 혐오가 싹튼다. 그는 악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선은 악을 복수하는 정의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자기 확신이 결국 무한한 자기 혐오로 바뀐 이상, 이아고에게 어떠한 벌을 내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던 게다.
결국 악은 목적을 달성했다. 탐욕스러운 악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었고 누군가를 파멸시켰다. 그 존재 자체의 역할을 다했다. 세상에 좋은 가치를 남겨 왔던 선은 허무하게 비극적으로 무너졌다.
셰익스피어는 선과 악이 결국 대립하면서 선이 승리하고 악이 처벌받는(응보) 정의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단순한 선악의 대립이라면 위고가 오셀로를 가리켜 “거대한 운명적 인간”이라고 애통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은 세상에서 존중받고 가치 있는 것이다. 선은 성공을 낳고 세상의 높은 곳으로 이끌 수 있다. 하지만, 선이 누구나가 바라는 성공을 움켜쥐면서 지고의 선을 추구할 때, 결국 악에게 쉽게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개츠비가 톰의 계략에 빠져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中에서), 오셀로는 이아고의 계략에 휘둘리면서 온 가족을 파멸시키고 있다.
또 하나. 셰익스피어가 표현한 ‘악(惡)’은 인간의 본연에 숨겨진 악한 씨앗(일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악은 그 자체로 당당히 존재하고 악한(악인)은 자신만의 목적(물욕, 권력욕, 가학증 등)을 달성할 때까지 부지런하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무수한 가치가 있다. 선은 그 가치를 아름답게 꾸민다. 선으로 인해 세상은 밝게 빛났고 빛날 것이다. 하지만 빛의 한편에 악도 있었다. 악은 세상을 밝게 만든 선을 증오했고 꼭 파멸시키고자 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眞理)에도 불구하고, 악은 제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마를 보았다”고 말한다.

 

유재원 변호사
● 법률사무소 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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