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일생

풀잎에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진 애벌레.

아스팔트 위를 기어간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몸을 뒤집는다.
뱃가죽이 아스팔트에 드르륵 끌린다.

그늘을 찾아 몸을 옮기는 데
온 생을 바쳤다.

늦은 오후.
뱃가죽이 뜯어진 애벌레 위로
그림자 잦아들고
온 몸에 딱딱한 주름이 진다.

나비 한 마리.
공중으로 날아간다.

풀잎이 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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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1일 홍대 경의선숲 책거리에 시인들이 모였다. 일명 ‘빼빼로데이’라고 부르는 날에 시인들은 시장에 난전을 폈다. 시집을 팔기 위해서다. 시인들이 거리에 나가 시집을 판다는 말이 꽤 상업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다. 시인 몇몇이 모여 작당을 하기 시작했다. 시인들이 직접 시집을 들고 거리에 나가 시집을 팔고 그 판매 수익금으로 좋은 일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아이디어로 시작되어 시인 14명이 모였고, ‘詩장사람들’이라는 이름도 만들었다.

시작(詩作)이 아닌 시장(詩場)에 모인 14명의 시인은 저마다 다채로운 콘텐츠를 만들었다. 시인들은 노래를 부르고, 타로를 응용한 ‘시로카드’를 봐주고,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를 찍어 고양이달력을 만들고, 쿠키에 시를 넣은 시쿠키, 시와 그림을 넣은 달그림과 ‘다포’, ‘시캔버스’, ‘시노트’ 등등을 만들어 시집과 함께 판매했다. 그날의 백미는 시인 14명이 모여 함께 시를 낭독한 ‘시아카펠라’ 공연과 각자의 시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낭독한 ‘시버스킹’이었다.

늦가을의 날씨는 좀 추웠지만 시인들과 시민들이 어우러진 시장(詩場)은 훈훈하고 즐거웠다. 어떤 이는 잔돈을 받지 않았으며 어떤 이는 후원금을 내놓고 가기도 했다. 그렇게 모인 수익금은 모두 마포구 결식아동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했다. 아무 대가 없이 즐겁게 참여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당시 ‘詩장사람들’에서 시민들에게 낭독한 시가 바로 <남자의 일생>이다. 이 시는 이 땅에 살아가는 남자들에 대한 은유이다. 애벌레는 이 땅에 살아가는 존재들 중에서 가장 낮은 곳을 기면서 살아간다. 나는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온 자아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다.

길을 가다가 벌레를 만났다. 길 위에 홀로 무심히 기어가는 벌레를 만난 것. 그때 문득 벌레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환상적으로나마 벌레가 되어 보기로 작정했다. 따지고 보면 내 삶이 벌레와 다를 바 없었다. 우주에서 보면 우리는 너무 작은 존재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소멸하더라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존재다. 이 작은 존재가 평생 돈을 벌고 이 세계의 부속으로 살다가 죽게 된다. 나는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많은 존재들은 그럴 만한 영혼들이 아니다. 긍지를 가지고 싶었다. 벌레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삶이다. 벌레의 육체로 땅을 기어가는 모습은 지금 우리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이다. 그 모습은 마치 고행의 모습과도 같다.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창자가 흘러내려도 그 고통을 이겨내는 긍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 벌레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간이기에 벌레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러한 고통을 숨긴 채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벌레에게는 희망의 순간도 있다. 벌레는 탈피를 하면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될 수 있으니까. 너덜너덜해진 육체를 벗어던지고 날개를 가진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의 영혼도 그런 희망의 순간을 찾아 매번 순례하고 있지는 않을까. 매순간 아주 짧지만 그런 순례의 순간을 찾아 이 삶을 견디는 것은 아닐까?

신화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이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순간. 지금 이 땅의 삶 너머를 생각하는 순간. 누구든지 신화의 시간이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이재훈 시인● 199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 저서로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부재의 수사학』, 대담집 『나는 시인이다』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현대시작품상, 한국서정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