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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예감의 필요조건

무죄(無罪)!! 누구나 법조인을 꿈꿀 때 한 번쯤 떠올렸을 장면이다. 하지만 막상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그리 쉽게 접할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무죄율(無罪率)은 고작해야 100건 중 1~2건 정도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무죄 변론을 하는 변호사에게 어쩌면 무죄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영역이기도 하다.


1971년 제1차 사법파동의 중심이자 형사변론의 대가였던 고(故) 이범렬 변호사님은 무죄의 조건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무죄를 받으려면, 피고인의 결백, 이를 믿어주는 변호사, 그 변론을 믿어주는 판사가 필요하다.” 언뜻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현실에서는 3박자를 모두 갖춘다는 게 녹록지 않다. 게다가 법대에서든, 사법시험에서든, 로스쿨에서든 누구도 ‘무죄받는 법’을 따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마치 청자(靑瓷)의 비밀이 함부로 전수되지 않듯이...


그렇다면, 정녕 무죄받는 법에 왕도(王道)는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하지만 무죄의 준비는 할 수 있다. 무죄 변론을 한다고 다 무죄를 받아낼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무죄를 예감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있다는 말이다.


우선 우리 형사소송법상 무죄는 유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적극적으로 무죄의 증거가 있어서 무죄가 아니라 유죄의 증거가 부족해서 무죄다. 물론 알리바이(alibi) 사건은 예외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역시 결국엔 유죄가 아니라서 무죄다.


간혹 법리착오 때문에 무죄가 얻어걸리는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현실에서 무죄 변론은 사실관계 다툼이요, 그 증거나 진술의 신빙성 다툼이다.


그래서 무죄 변론의 첫발은 기록 복사다. 기록 복사는 무식할수록 좋다. 2만 페이지라도 상관없다. 최소한 판검사가 보는 기록만큼은 변호인도 똑같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복사 기록 한 장 때문에 공소가 취소된 적도 있다.


둘째, 복사 기록은 피고인에게 전달돼야 한다. 특히 구속됐을 땐 더 그렇다. 억울하다는 피고인에게 기록을 던져주면 진짜 무죄인지 대충 감이 온다. 왜냐하면 억울한 피고인일수록 구치소 안에서 24시간 동안 기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살펴본다. 그리고는 기록상 허점을 변호인에게 일러바친다. 그렇게 하지 않는 피고인이라면 대개는 ‘나이롱’ 피고인이다. 구치소 안으로의 기록 전달을 모르거나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변호인이 의외로 많다. 기록을 달달 외울 피고인을 상대할 뒷감당이 어려워서... 그래도 해야 한다.


셋째, 변호인의 기록 정리는 언제 어디서든 기록 내 키워드(key word) 검색이 가능해야 한다. 얇은 기록이라면야 머릿속 CPU 가동으로도 충분하겠지만, 방대한 기록이라면 요약하거나 옮겨 적는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타자 치는 막노동이 따로 없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변호인의 최후 변론에서 무죄를 주장하면서 “이 사건 기록을 통틀어 보아도...”라는 멋진 멘트는 감히 기록을 씹어 먹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넷째, 포커페이스 판사는 무섭다.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언제 무죄 변론의 뒤통수를 치는 판결을 선고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역설적으로 유죄의 예단을 드러내는 판사는 차라리 고맙다. 중간에 무죄 변론의 궤도를 수정할 기회를 주니까. 그러니 공판 진행 중 무심코 흘러나오는 판사의 말이나 행동의 시그널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요즘엔 CD증거들이 늘었다. 동영상, 문자 메시지, CCTV, 금융거래내역 등등... 자칫 종잇장 기록만 중요하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CD 안에는 미처 예상도 못한 반증이 들어 있기도 하니까. 그래서 CD증거들도 모두 복사해야 한다.


여섯째, 시간대별 이유나 동기가 문제되는 사건에서 필요한 건 ‘기록의 재구성’이다. 연월일 단위 또는 시분초 단위로 기록 내 의미있는 사실들을 편년체(編年體)로 사건일지를 작성하면 효과적이다. 일종의 사건 인덱스(index) 파일이라고나 할까? 나중엔 당사자보다 더 시퀀스(sequence)의 이유나 동기, 의미를 잘 알게 되기도 한다. 사건 속에 숨은 진주 찾기인 셈이다.
일곱째, 증거인부는 대충 타협해선 안 된다. 심지어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번의(翻意)하더라도...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조차 때로는 내용 부인의 여지가 있다. 형식적이든 실질적이든 그 진정성립에 의심이 간다면, 귀찮더라도 문제의 장면에 토를 달아 증거인부 하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 진술 녹화가 되었을 때라면 몰라도...


여덟째, 검사 측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은 대개 진술의 앞뒤 모순 탄핵에 집중하는 듯하다. 가장 쉬운 탄핵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순 없다. 작심하고 진술하려는 자는 거짓일수록 오히려 진술의 핵심은 일관될 수도 있다. 그래서 보충적으로는 편년체 사건일지를 활용하여 그 진술의 의미 모순, 반(反)이해관계의 본질 등을 찾아내 탄핵할 필요가 있다.


아홉째, 변호인의 최후변론이나 변론요지서는 무죄 변론인 만큼 판사와 역지사지(易地思之)할수록 좋다. 판사에게 유죄 판결문은 선고형의 결정 외에는 대부분 ‘Ctrl+C(복사)나 Ctrl+V(붙여넣기)’ 재활용이라 쓰기 쉽다. 그러나 무죄 판결문은 유력한 유죄의 증거를 믿지 못하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해야만 하기 때문에 번거롭고 쓰기도 어렵다. 그러니 무죄 변론이란 미리 써보는 무죄 판결문일 수 있다. 혹시 선고기일 연기는? 그 자체로 의미있진 않지만, 피고인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시그널이다.


끝으로, 변호사마다 저마다의 무죄 변론 비책이 있을 수 있다. 각자 개성도 다르니까.
적어도 나는 무죄 예감을 위한 변론 준비는 이 정도 해야 한다. 그래야 기다리는 동안 설렌다.

 

임영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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