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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드워킨의 『권리존중론』 읽기

나는 대학시절 법학과 학생이라는 자의식으로 자못 진지하게 법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 라드브루흐(G. Radbruch)의『법철학』(Rechtsphilosophie)이었으나 사고의 미성숙으로 인하여 또는 현실과의 타협 속에서 얼마 읽지 못하고 방치하였던 기억이 있다.


최근 나는 인문학의 유행에 편승하여 다시 법과 철학에 관한 책을 보다가 로널드 드워킨을 읽게 되었다. 하버드대 로스쿨의 캐스 선슈타인(Cass Sunstein) 교수에 의하면 드워킨은 “지난 100년 동안의 가장 중요한 법철학자 중의 하나”이고 “아마도 그 중에서 선두를 차지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드워킨(Ronald Dworkin, 1931~2013)은 미국에서 태어나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옥스퍼드대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한 뒤, 예일대, 옥스퍼드대, 뉴욕대에서 교수로 있었다. 드워킨은『권리존중론』(Taking Rights Seriously, 1977),『원리의 문제』(A Matter of Principle, 1985),『법의 제국』(Law’s Empire, 1986),『고슴도치를 위한 정의론』(Justice for Hedgehogs, 2011) 등의 저서를 발표하였다.


드워킨은 지금까지도 지배적 견해로 통용되고 있는 하트(H. L. A. Hart)의 법실증주의(legal positivism)를 비판하고 참신한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드워킨은 법이 실증주의자의 주장 -명백한 사실로서의 법개념(plain fact view of law)-처럼 일견 명백한 관행이나 관례와 같은 사회적 사실로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법이 실용주의자(pragmatist)의 주장처럼 사회의 최대 행복을 위한 도구적 프로그램도 아니라고 한다. 드워킨은 법 또는 법의 의미는 가치판단과 결부된 ‘해석’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한다. 드워킨에 의하면 어떤 사안에서의 법의 해석은 공동체의 도덕적 가치에 비추어 당해 사안을 공동체의 최선의 작품으로 구성(constructive interpretation)하는 것이다.
드워킨이 구상하는 법의 개념은 ‘전일성(全一性)으로서의 법’(law as integrity)이다. ‘integrity’는 순일성 (純一性), 정합성(整合性), 통합성(統合性) 등으로 번역된다. 드워킨은 법이 법률과 판례의 단순한 집적도 아니고 또한 법관의 재량적 창작도 아니라고 한다.


드워킨은 법률이나 판례에는 사회공동체의 정치적 ·도덕적 기준 - 원리(principle) - 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사안을 규율할 법률과 판례가 표면적으로는 없다고 하더라도, 법에는 흠결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드워킨에 의하면 법은 기존의 법률과 판례에 적합하면서도 당해 사안을 공동체의 최선의 사례로 구성하는 원리에 의하여 온전하게 유지된다. 그는 법률이나 판례의 근저에 내재된 정의(justice), 공정성(fairness), 평등한 배려와 존중(equal concern and respect) 등과 같은 원리가 미래의 사안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중력적 효과’(gravitational force)를 가진다고 표현한다. 그는 법이 이러한 원리를 구심점으로 하여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 더 큰 반지름의 동심원을 그려 나간다고 한다.


드워킨의『권리존중론』(우리말 번역본은『법과 권리』)은 드워킨을 세상에 알린 데뷔작으로 그의 법사상의 기본적 발상을 담고 있는 책이다. 드워킨은 이 책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사안’(hard case)에서도 법은 존재하며, 법관은 입법 유사의 재량을 행사하여 법을 ‘창조’해서는 안 되고 다만 해석에 의하여 법을 ‘발견’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때 법관은 정책(policy)이 아니라 원리에 입각하여 판결하여야 한다고 한다. 정책은 집단적 목표를 지향하는 것으로 입법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이지만, 원리는 도덕적 기준으로부터 발생하는 권리를 지향하는 것으로 사법 차원에서 취급할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드워킨은 사법부의 재판이 공동체에서 집단적으로 계획된 목표보다는 공동체의 도덕성에 기초한 개인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보호하여야 하는 것으로 본다.


드워킨이 우리 법과 사법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가령 이러한 사건을 살펴볼 수 있다. 사용자 회사(대기업)는 외주회사에 소속 근로자들을 전직시키면서 근로자들에게 정년까지의 급여 중 30%는 일시불로 지급하고 나머지 70%는 외주회사에서 지급받도록 하겠다는 취지의 제안을 하였다. 근로자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전직을 신청하였다. 이후 근로자들이 외주회사에서 근무하여 보니 임금 수준이 70%가 되지 않았다. 이에 근로자들은 사용자 회사를 상대로 임금 차액의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대법원은 사용자 회사의 제안은 청약의 유인에 불과하고 70% 임금 수준은 정책적 목표에 불과하여 근로자들이 이에 대한 법적 권리를 가진다고 볼 수 없다며, 근로자들에게 패소판결을 선고하였다(대법원 2016년 선고 판결).
드워킨의 눈으로 이 사건을 본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근로자들은 신의칙으로부터 나오는 상당한 신뢰와 기대라는 논거를 가진다. 사용자 회사는 경영 정책상의 목표라는 논거를 가진다. 그렇다면 드워킨은 아마도 ‘도덕성에 기초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라’고 말할 것이다. 나아가 드워킨은 ‘당사자들이 속한 사회공동체 전체의 도덕적 관점에서 당해 사안이 공동체의 최선의 사례가 될 수 있도록 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 판결의 결론은 달리 구성될 수 있지 않을까?


드워킨의 사상에는 법과 도덕(윤리)을 통합하려는 헤겔(G. W. F. Hegel)의 법철학, 정언명령에 기초한 칸트(I. Kant)의 도덕철학과 롤즈(J. Rawls)의 자유주의적 정의론의 영향이 배어 있다. 뉴욕대 로스쿨의 제레미 월드론(Jeremy Waldron) 교수는 드워킨이 “법실무에는 법규정의 기계적 적용이 아니라 이성과 사려 깊음이 있다고 믿는 하나의 살아있는 법학(living jurisprudence)을 제시”하였다고 평한다. 나는 드워킨을 읽으며 그의 글의 명료함과 우아함에, 그의 생각의 품격에 깊게 감명받았다.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요즘, 드워킨의 입문적 저작인『권리존중론』을 읽으며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김태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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