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시인의 마음
만약이라는 약

 

만약이라는 말이 늘었다. 과거를 돌아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가정하는 일도 덩달아 많아졌다. 만약 저 버스를 탔더라면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을 텐데, 코트가 아닌 패딩을 입고 나왔다면 버스를 기다릴 때 오들오들 떨지 않았을 텐데, 점심으로 샐러드를 먹었더라면 오후 세 시에 절로 눈이 감기는 일은 없었을 텐데, 원래 다니던 길로 갔으면 오소소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너를 떠올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몇 번을 썼다 지웠다 한 문자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 기분이 이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을 텐데…….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복기할 때면 온통 후회투성이다. 어떤 일을 해서 후회하고 어떤 일을 하지 않아서 후회한다. 그러고 나면 밤늦게까지 후회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후회가 든다. 후회가 후회를 낳는 셈이다.


어느 날 문득, 만약으로 시작되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늦잠을 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날이었다. 휴대전화를 보니 부재중 전화가 일곱 통이나 와 있었다. 만나기로 한 시각에서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이삼십 분도 아니고 머리가 멍했다. 별도리가 없었다. 전화를 걸고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사과를 했다. 상대방은 괜찮으냐고, 전화를 받지 않아 큰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했다며 도리어 나를 토닥여주었다. 나 자신이 정말 싫었다. 여섯 잔이나 마신 커피가 문제였을까. 어젯밤에 문득 펼친 책에 빠져든 게 문제였을까. 알람을 꺼둔 상태로 잠든 게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후회는 다른 후회의 꼬리를 물고 회한이 되었다.


만약이 비단 ‘후회’를 향해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만약이 과거와 결합하면 보통 후회에 가닿게 되지만, 미래와 결합하면 어떤 ‘기대’로 변모한다. 만약 그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붙잡을 텐데, 내일모레 내 생일에 첫눈이 내린다면 더없이 기쁠 텐데, 그저께 산 복권이 당첨된다면 부모님께 집을 한 채 지어드릴 텐데, 꾸준히 글을 쓰면 언젠가는 작가가 되어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낼 수 있을 텐데……. 이런 가정은 보통 한낮에 이루어진다. 점심을 먹고 차 한 잔을 마시며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볼 때, 혹은 길을 가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햇살이 반기듯 나를 향해 쏟아질 때. 기대는 점점 부풀어 오르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어깨가 으쓱하기도 한다.


만약은 일종의 약이다. 지금-여기를 잠시 잊게 해준다. 그때-거기로 나를 데려다주기도 하고 미래의 나를 꿈꾸게 해준다. 만약이라는 약이 없었다면 나는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회하지 않았다면 잘못을 깨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뉘우치는 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만약이라는 약이 없었다면 나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다면 내일을 위해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그 어떤 일도 스스로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때문에, 아니 만약 덕분에 나는 시인이 되었다. 삶의 여정에 있었던 무수한 만약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오은 시인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오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 글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