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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수첩

아침의 숲을 거닐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나뭇잎들을 보았고 고개를 숙여 부러진 가지를 넘으며 짙푸른 고사리들을 만져보았다. 잎은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보여준다. 어느 순간 사람의 머리칼이나 눈빛이 다른 느낌을 자아내어 그것을 보는 이에게 예기치 못한 감정을 던져주듯이. 나뭇잎 사이로 빛나던 빛이 나뭇가지들 틈새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빛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계속 걷고 있었으니까. 어떤 목적도 없이 그저 걷는다는 것만으로 온몸이 정화되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침이 지고 정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강원도 여행을 갔다. 친구들은 숙소에서 아웅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고 나는 잠시 떨어져 나온다는 것이 두 시간이 넘도록 혼자 숲속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진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여행은 간밤의 꿈같은 것이다. 아침이 되면 꿈이 사라지듯 여행도 집에 도착하면 피곤으로 잊혀져간다. 꿈속에서는 지금의 시공간이 사라지고 새로운 시공간이 나타난다. 그곳에는 오래전 헤어졌던 애인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나 불운이 시시각각 찾아오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이상한 사람이 되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내 영역을 벗어난 나만의 꿈이다. 끝없이 검고 나약한 꿈의 현현이다. 눈을 감으면 혼자 흔들리는 그네가 있고 눈을 뜨면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잊혀지는 것. 그렇게 꿈은 차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우리의 하루하루처럼.

나는 지금 숲을 거닐고 있지만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휘갈긴 기억들이 발끝에서 부서지고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랑은 모든 이들을 철부지들로 만들어버린다. 어느 날엔 낭만주의자들의 식탁처럼 플레이팅이 잘 된 음식들을 보는 것 같다가 어떤 날은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음식 찌꺼기들만 눌어 붙은 접시를 보는 것 같을 때, 나약한 영혼의 사람들은 다시 자신만의 숲속으로 들어간다. 누구도 등을 두드리지 않고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오롯이 혼자만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숲과 꿈은 정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숲에서 어지러운 마음을 가다듬기도 하고 고질적인 피부병을 회복하기도 한다. 꿈에서는 그리던 사람을 만나게 될 때의 행복감이나 오래전 잘못했던 일에 대해 미처 사과하지 못한 이에게 사과를 하고 난 뒤의 후련함을 만나 결국 그에게 진짜 마음을 전하게 되기도 한다. 내게 꿈은 어떤 산책자의 몽상을 떠올리게도 하고 쓰지 못한 시의 구절을 잎이 무성한 숲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제 나는 핸드백에서 수첩을 꺼내어 숲을 기록한다. 나는 오늘 이곳, 이름 모를 숲에 다녀왔고 느린 꿈을 꾸었다라고. 희고 막막한 페이지를 다시 넘긴다.

 

 

 

 




박은정 시인
●1975년 부산 출생. 2011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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