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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교수와의 추억


박 변호사가 1심을 뒤집을 수 있으려면 우리 대학의 역사를 공부하여야 하네!” 머리에 서리가 내린 老교수가 한아름 뭉치를 주섬주섬 건네준다. 보자기를 열었을 뿐인데 퀴퀴한 먼지 냄새가 회의실에 퍼졌다. 사다리가 없다면 손길조차 닿기 어려운, 도서관 맨 윗줄에 방치되었음을 능히 짐작 가능한 학교 설립 20년, 70년, 90년, 100년 기념책자가 보자기 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古書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책 뭉치를 책상 한쪽으로 미루고, 老교수로부터 내용을 들어보았다.
유명 女子大學校 및 다수의 학교를 설치, 경영하는 학교법인의 설립자가 문제된 사건이었다. 학교법인의 모태가 된 義塾이 대한제국 시절에 설립된 이래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설립자에 관한 문제제기가 없었다가, 갑자기 “설립자 기재가 잘못되어 있으니 이를 정정하여 달라”는 소가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老교수는 “1심법원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학교법인의 패소판결을 선고하였다”고 하였지만, 어디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 있겠는가? 판결이유를 하나하나 검토해보니, 老교수의 말과 달리 쉬운 사건이 아니었다.
어찌되었던 난 老교수로부터 100년이 넘는 학교법인의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老교수는 과외선생처럼 지도하였는데, ‘학생’이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꾸짖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격려도 잊지 않았다. 30여 년이 넘는 강의 경험을 자랑하는 듯한 老교수는 적절한 주입식 방식과 이해 위주의 방식을 병행하면서 그만의 교수법을 일거에 쏟아 부었다.
目不忍見이었던 학교에 대한 나의 이해도는, 어느 순간 老교수가 눈을 비비고 나를 대하여야만 하였으며(刮目相對), 소송을 진행하면서 靑出於藍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동시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신문마냥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이 익숙해졌고, 학교법인 역사에 등장하는 웬만한 분들의 호칭은 본명 대신 그분들의 호로 칭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전부 패소한 사건의 항소심이었기 때문에 재판의 진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변론기일이 진행될 때마다 인격권에서의 난해한 쟁점, 수십 년 전에 이루어졌던 정관변경 등의 해석이 나를 옭아매었다. 한자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던 나였지만,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한자가 많았고, 마우스로 한자의 모양을 그려가며 네이버 한자사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수차례 변론기일을 진행한 결과, 우리는 학교의 설립자로 기재되어 있지 않은 甲이 설립에 있어 재정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甲 역시 설립자로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甲 및 그 아들은 현재 설립자로 기재된 乙을 설립자로 호칭하는 것에 대하여 용인하고 있었으며, 특히 甲의 아들은 자발적, 적극적으로 乙이 설립자라고 수차례 대외적으로 호칭하는 등으로 乙이 설립자로 기재되거나 명명될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용인하였다는 점에 변론의 초점을 두기로 하였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수십 년 전에 작성되었던 이사회 회의록, 교육사 등 관련 문헌 등을 검토하였으며, 老교수와 나는 경쟁하듯이 “이것이 더 유리한 자료”라면서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를 찾고 분석하며, 서로 기뻐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팽팽한 긴장관계에 이를 때도 있었는데, 각자 발견한 것이 더 유리한 자료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그러하였다.

어느덧 항소심 판결 선고일.
우리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을까? 아니면, 老교수의 노력을 알아주었던 것일까? 항소심은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전부 기각하였다.
휴대전화로 老교수에게 승소소식을 알려준 후, 깜박 잊은 말이 있어 다시 전화를 하였지만 30분 넘도록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승소의 기쁨을 이곳저곳에 알려주고 있었던 老교수의 휴대전화는 잠시의 틈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다수의 언론보도를 통해 항소심판결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상대방은 상고를 하였다. 미국 로스쿨 LL.M.과정에 진학이 예정되어 있었던 나는 답변서까지 작성한 후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지만, 미국에서도 이 사건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몇 가지 추가 쟁점을 정리한 보충답변서를 제출하였고, 대법원은 항소심판결을 그대로 확정지었다.

‘나의 소송이야기’의 집필을 부탁받고, 곧바로 생각났던 인물은 말씀드린 老교수였습니다. 제가 담당하였던 사건에서 사립학교의 설립자 및 인격권 침해의 판단기준이 정면으로 문제되었고, 항소심 및 대법원은 그 판단기준을 명확히 설시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사립학교 설립자 사건을 다루는 변호사에게 변론의 방향을 설정한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는 판결로 보입니다.
老교수의 수제자로서 目不忍見, 刮目相對, 靑出於藍의 단계를 거친 저는 지금도 老교수와 같은 클라이언트를 모시고, 다양한 사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적절한 주입식 방식과 이해 위주의 방식을 병행하면서 나름의 교수법을 보여주었던 老교수가 생각납니다.
이상으로 저의 소송 이야기를 마칩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원님들 모두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박동열 변호사
●법무법인(유한)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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