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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산책자

양가감정들의 나날들

내 안의 소용돌이를 주체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어지러운 감정과 닮은 사물과 말을 찾기 위해 한없이 방황하다 지치곤 했다. ‘궁극의 산책자’는 언어의 한계성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의 나를 위로하기 위해 쓴 시다.
누구나 ‘양가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서로 부딪히는 두 가지의 감정이 함께 공존할 때 우리는 종종 마음의 늪에 빠진다. 양가감정이 극대화되면 말수가 줄고, 결국 말을 잃기도 한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낯설기 때문이다. 감정과 생각이 언어로 담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자신과의 불화는 한없이 계속된다. 늪을 탈출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면 스스로 입을 다물고 고립되는 것이다. 이렇게 ‘양가감정’의 늪에 깊이 빠지면 마음만 답답할 뿐, 도저히 진취적인 행동을 도모할 수가 없다.
내 안의 소통이 건강하지 못했던 그 시절, 나의 목소리와 표정은 모두 내가 아니었고, 움직임은 낯설고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내가 낯설어진 것이다.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습관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중요한 방편이다. 그러나 일상적 범주를 넘어설 경우, 주체의 특성은 사라지고 양가감정만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에곤 실레의 그림「이중자화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남모르게 혼란을 겪던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고, 감정이 확 풀려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림 형태로 보아 화가도 나와 비슷한 혼란을 겪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림 속 두 인물은 동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눈빛을 보면 한 사람은 부드럽고, 한 사람은 경계심이 많다. 양면적 속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양가감정의 혼란은 나의 시선과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딪히면서 생긴다.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인간의 시선을 탈피해 자연의 공평한 시선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파악하고자 하며, 그것은 주체를 잊으려 한다는 점에서 죽은 자의 시선과도 닮았다.
자신의 죽음을 살아 있을 때 묵도하는 사람에게는 내적 용기가 충만하다. 죽음의 시선으로 보면, 내 안의 소용돌이는 한낱 가벼운 것일 수밖에 없다. 삶은 인생의 수많은 벽을 넘어야 하는 통과의례로 가득하지만, 죽음은 수많은 벽이 무너진 이후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벽이 사라진 너른 들판은 바람도 부는 대로 흐르도록 놓아준다.
자신의 죽음을 묵도하고, 다시금 인생을 조망할 수 있다면 ‘새로운 탄생’도 도모할 수 있다. 그리하여 ‘궁극의 산책자’처럼 격정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바로 내 안에 숨겨둔, 벽이 무너진 너른 들판을 거닐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아닐까.









김제욱 시인
●2009년 『현대시』 신인문학상,
2016년 시집 『라디오 무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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