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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 - 빚의 대물림, 가난한 상속자들의 아픔에 관하여

 

빚의 대물림, 가난한 상속자들의 아픔에 관하여

 

 

 

민법 제1026조는 단순승인을 상속의 원칙적인 모습으로 정하고 있다. 즉, 상속인이 상속개시있음을 안 날로부터 3월 내에 한정승인 또는 포기를 하지 않으면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본다. 다만, 상속인이 빚이 더 많다는 것을 모르고 승인하게 된 때에는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3월 내에 한정승인을 할 수 있다.

 

위 법규정은 언뜻 지극히 당연해 보이지만, 상속을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의미가 전혀 달라지게 된다. 즉, 단 10원이라도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의 입장과 빚만을 물려받는 사람의 입장은 천지차이다. 빚만을 물려받는 가난한 상속자들에게 위 법은 너무 차갑고 아픈 것이며, 그들의 대리인에게 위 법은 헌법에 위반되어 보인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첫째로, 자기 책임의 원리에 반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사후에 자기 돈을 자식들에게만 물려주는 것이나, 자식이 부모를 잘 만나서 돈을 물려받는 것에 대해서까지 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부모가 재산 없이 빚만 남기고 떠났다고 하여 가난한 부모의 자식이 그 빚을 갚아야 할 1차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는 의문이다. 필자는 부모가 빚을 남기고 떠난 경우에 영문도 모르는 자식이 혼자서 그 빚을 갚는 것이 우리 법질서의 태도나 당사자의 추정적 의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둘째, 평등의 원칙에 반한다. 위 법은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과 빚을 물려받는 사람을 차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너무 까칠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가령, 부모님이 밥솥 하나라도 물려주고 떠난 경우라면 위 법의 문제를 도무지 느낄 기회가 없었을 테니까. 또 ‘빚만 물려받은 사람도 한정승인이나 포기하면 되고, 당시에 몰라서 안 해도 나중에 알았을 때 한정승인하면 되는데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빚만 물려받은 가난한 자에게 이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빚만 남기고 떠나는 사람은 상속인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그냥 떠나는 경우가 많다(재산을 남기고 떠나는 사람이 대개 ‘유언’을 하는 것과 대비된다). 상속인도 별 기대를 안 하고 인생이 힘들기 때문에 망자의 재산, 채무관계를 조사해 보지 않는다(부자의 상속인들이 열심히 조사해 보는 것과 대비된다). 그러니 빚의 상속자들은 장례만 치르고 힘든 일상으로 복귀하여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채권자로부터 ‘소장’을 받게 된다. 이러한 소송에 응소하고 상속한정승인절차를 밟는 것은 가난하고 무지한 상속인들에게 생소하고 어려운 일이며, 그 과정에서 법률적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빚을 뒤집어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령, 부모가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나 할머니가 손녀를 키우고 사는 경우에 부모의 채권자들은 손녀에게 소송을 제기하는데, 할머니가 손녀 대신 소장을 송달받은 뒤 장롱 깊은 데 넣어 두고 잊어버린 채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해 보라.

 

셋째, 개인정보침해의 문제이다. 대법원은 망자를 상대로 소를 제기한 경우 상속인으로 당사자표시정정을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금융기관들은 채무자가 사망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망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그 뒤에 법원으로부터 ‘보정명령’을 받아서 망자의 제적등본 등을 발급받고 상속인들로 당사자의 ‘표시’를 정정한다. 이 과정에서 채권자는 자신과 아무 거래관계도 없는 상속인들의 신상이며 가족관계(혼인과 이혼을 포함)에 관한 정보를 취득하게 된다. 가난한 자의 상속인들은 개인정보를 보호받을 권리도 없는 것일까? 부모가 빚만 남기고 떠난 경우에는 카드회사에 나의 개인 신상정보는 물론이며 혼인관계와 자녀들의 신상마저 모두 털리고 아무런 통지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 과연 법에 부합하는가?

 

넷째, 재판을 받을 권리 침해 문제이다. 법원은 망자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1순위 상속인으로 당사자표시정정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1순위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할 경우 2순위 상속인으로 또다시 표시정정을 허용하고 있다. 이 때 1순위 상속인은 너무나 황당한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거래관계도 없던 금융기관으로부터 돌아가신 부모가 남긴 빚을 갚으라며 소송을 당해서 겨우겨우 알아보고 상속포기를 하고 없는 형편에 변호사를 선임하여 답변서까지 냈는데, 그 후로 법원에서 아무 연락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자녀나 친척이 또다시 소장을 받게 되는 것이다. 법원은 소송을 당해서 대리인을 선임하고 답변서까지 내면서 조마조마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는 아무런 연락조차 주지 않고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 1순위 상속인과 2순위 상속인은 엄연히 별개의 인격체인데 어떻게 표시를 정정하는 것만으로 피고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최소한 법원에서 우편물을 받고 떨리는 마음으로 재판에 응했던 사람에게 ‘이제는 재판에 안 와도 된다’는 기별은 한 번 줘야 하지 않을까?

 

 

자녀에게 적든 많든 재산을 남기고 가는 부모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빚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때 가난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위와 같은 법률적 고통 외에 가난한 부모를 만나 이런 고통을 당한다는 심리적 아픔마저 겪게 된다. 이제 상속의 원칙을 ‘단순승인’에서 ‘포기’로 바꾸면 어떨까? 그러면 빚의 상속자들은 위와 같은 불이익과 아픔에서 벗어나게 된다. 대신 재산의 상속자들은 법원에 단순승인 혹은 재산목록을 첨부하여 한정승인의 신고를 하는 수고를 겪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쪽으로 의제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신고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면, 재산을 물려받는 쪽이 신고를 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상속자들이 재산을 조사하고 신고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보다 투명해지는 것은 덤이다.

 

 

박종명 변호사

사법시험 제45회(연수원 35기)

어니스트위즈덤 법률사무소, 이화여자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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