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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지 감수성, 알고 계시죠?

올해 초 유명한 정치인이 업무상 만난 비서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법정구속되었을 때, 20년 남짓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나에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성인지 감수성이 대체 무엇이기에 없다던 죄가 있는 것으로 뒤집히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성인지 감수성은 우리가 이전에 성평등 의식이라고 부르던 개념과 비슷한 것인데, 특히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된 사건을 처리하고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피해자가 처해있던 절박한 사정을 이해한 다음 피해자의 진술을 함부로 배척하지 말고 해당 사건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열심히 설명했지만 한참 얘기를 듣고도 질문했던 사람들의 표정은 영 개운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선녀와 나무꾼’ 전래동화를 사례로 성인지 감수성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바로 그 이야기, 즉 성실하고 약한 자를 돕는 착한 성품의 나무꾼이 선행을 베풀고 선녀를 배우자로 맞이하여 행복한 여생을 살았다는 바로 그 스토리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담아 후세에게 널리 전하는 그 이야기에서 나무꾼이 한 일이 정말 착한 일이었는지 좀 더 적나라하게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포수에게 쫓기던 사슴을 구해준 나무꾼은 보은하겠다며 사슴이 알려준 ‘고급 정보(?)’를 바탕으로 깊은 산속 폭포수 밑에서 목욕하는 선녀들을 훔쳐보다가 날개옷 한 벌을 절도하여 숨겨, 선녀를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없게끔 곤경에 빠뜨리고 그 선녀에게 다가가 호의를 베푸는 척 하며 집으로 데려가 돌봐주면서 길들이다가 성적 대상으로 삼고 나무꾼 자신만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나무꾼이 사슴에게 했다는 선행은 기억하면서도 과연 선녀는 어떻게 살았을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선녀의 입장에서 다시 서술해보면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 이야기가 됩니다. 성폭력 예방교육을 진행하게 되는 기회에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과연 누가 그렇게 행복한 여생을 보냈는가” 질문해 보면 사람들은 단박에 “나무꾼!”이라고 답했고, “내가 만일 선녀라면 행복했을까?” 다시 질문했을 때 많은 여성들은 “내가 선녀라면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부터 선녀의 시각으로 그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친구들의 제안으로 지상의 풍광 좋고, 물 맑은 폭포 구경을 나갔다가 더위도 식힐 겸 잠깐 계곡에 몸을 담갔던 선녀는 날개옷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하늘나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갈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는 절박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때 처음 보는 나무꾼이 다가와 친절을 베풀며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였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선녀는 나무꾼에게 의지한 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무꾼의 성적 파트너가 되었고, 자녀를 낳아 기르게 되었습니다. 체념하며 살아가던 선녀가 집안의 묵은 때를 닦아내고자 대청소를 감행하다가 창고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날개옷을 발견하고 느낀 배신감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이 나무꾼과 살았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이제는 이 땅의 법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은 알게 된 선녀가 사법기관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남편이라 생각하고 함께 살았던 그 사람은 알고 보니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나의 날개옷을 절도하였고, 그로 인해 곤경에 빠져 선택지가 따로 없었던 나에게 호의를 베풀며 길들인 후 성적 파트너로 삼았으니 사기 결혼을 한 것입니다.” 또한 그 본질은 그루밍 성범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죄를 물어달라고 했을 때, 사법기관이 선녀에게 “아주머니, 남편이 그렇게 싫으셨으면 처음부터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되지 왜 거절하지 않고 지금껏 잘 사시다가 이제 와서 뜬금없이 신고를 하시는 거예요? 처음부터 고소를 하셨어야지요. 남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아주머니를 어디에 묶어 둔 것도 아니고,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아이도 여럿 낳고 함께 별 탈 없이 사셨으면 아주머니도 좋으니까 같이 계셨던 것 아닌가요? 이제 와서 신고라니요!” 라고 말하며 피해호소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사법기관의 판단은 공정할까요? 나무꾼 입장에서 할 법한 이야기를 사법기관이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러한 피해호소를 듣고 사안을 판단하는 입장에선 사람은 나무꾼이 아니라 피해 당사자인 선녀의 입장에서 사건을 이해하고 판단해야 하며, 이러한 관점을 성인지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성인지적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보는 사람은 높은 성인지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가해 행위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것에 매우 익숙하여 피해자의 호소보다 가해자 중심 구도로 사건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해자들은 침해당한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신고하지 못하고 오히려 침묵하기를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상담자에게는 끝까지 비밀을 지켜달라는 당부가 이어졌습니다.

2017년 가을, 미국의 할리우드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MeToo 운동이 전 세계를 휩쓸고, TIMES紙가 2017년 올해의 인물로 #MeToo 운동을 촉발시킨 할리우드 여배우들을 표지모델로 선정했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작년 초부터 우리나라에도 피해자가 직접 자신의 피해사실을 용기 내서 말하는 사회적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본권리 침해를 경험하고도 권리회복을 주장하지 못했던 피해자들을 옭아맸던 그 족쇄는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대해왔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도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우리는 왜 귀중품을 혼자 들고 나갔냐, 왜 늦은 시간에 가지고 다녔냐고 묻지 않습니다. 사기를 당한 사람에게 왜 그 옷을 입고 나가서 사기를 당했냐고 탓하거나 빨리 잊고 가해자를 용서하라 또는 그 사람 원래는 착한 사람이었다면서 사과를 받고 끝내는 것이 더 좋다고 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적 자기결정권 피해를 입고 괴로워하는 피해자에게 뭔가 스스로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가해 행위자 입장을 대변하는 말들을 너무도 많이 해왔습니다. 가해자 중심의 관점을 알고 있는 많은 피해자는 주변인들로부터 추가로 상처(2차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권리회복을 포기하고 상담자에게만 하소연 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공동체 구성원인 제3자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행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피해자가 권리구제를 위해 용기를 낼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여러분은 피해자의 입장을 얼마나 공감하고 지지하시나요? #WithYou 하는 당신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노정민 대표
●한국대학성평등
상담소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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