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열린사랑방
인공지능시대 도래에 따른 법조인의 도전과 과제

지능이란 무엇인가.
판사, 검사, 변호사, 법학과 교수님들에게 지능이란 어떤 의미일까.
법조계에서 생각하는 지능에 대한 답변을 뒤로하고 AI를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다음과 같은 고전을 빌려 지능에 대한 설명을 해 보고자 한다.
앨런 튜링은 1950년에 철학 저널 Mind에 발표한「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기계가 지능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조건을 언급했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긍정적이라고 답변했다. “컴퓨터가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라는 핵심 질문에 대해 그는 “컴퓨터로부터의 반응을 인간과 구별할 수 없다면 컴퓨터는 생각(thinking)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출처: A. M. Turing (1950)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Mind 49: 433-460. https://www.csee.umbc.edu/courses/471/papers/turing.pdf와 위키피디아 인용)

앨런 튜링의 지능에 대한 정의 이후, 2013년에 ‘Her’이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영화가 한편 개봉되었다. 영화는 외로움을 느끼는 수많은 남성들이 ‘사만다’라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영화의 끝부분에 이르러, 기계와의 사랑을 눈치 챈다. 주인공과 관객 모두에게 ‘그녀(her)’와 ‘그 기계(machine)’의 경계를 생각하게 하였다.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구분’, ‘구획’ 어쩌면 경계를 나누는 능력을 지성으로 본 셈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지능인지 기계의 지능인지를 지성미 넘치는 인간이 구분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를 때 ‘인공지능’이라 보았다. 필자는 삶의 여러 선택에서 내리는 판단, 그 한 땀 한 땀의 결정을 구분(classification)하는 힘을 지성으로 생각한다.

생활 속으로 이 문제를 가져 와 보겠다. 가벼운 마음으로는 아침에 눈을 떠서 ‘방탄커피를 마실지, 신선한 야채 주스에 견과류를 먹을지, 든든하게 소고기국에 밥을 말아 먹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낮은 선택 수준의 지성이다. 블루보틀이라는 커피전문점에 가서는 생소한 이름의 여러 커피 종류 중 무엇을 마실지를 결정해야 한다. 대부분의 결정은 배타적 관계를 갖기 때문에 이 커피(싱글 오리진, 블랙커피류)를 선택하면, 저 커피(뉴올리언스, 라떼 종류의 커피)를 굳이 더 선택하지는 않는다. 이 선택의 기준, 즉 그 경계를 구분할 때 우리 지성은 어떤 메커니즘(신경망적인 노드의 연결과 에지의 이어짐 그리고 노드와 노드 간의 활성화)을 뇌의 지도에서 보일 것인가.

조금 복잡한 상황으로 가볼까 한다. 법관은 선고를 내려야 한다. 무혐의와 혐의 있음은 다소 명확하게 구분되는가. 50만 원 벌금형과 100만 원 벌금형은 어떤가. 1년의 형집행과 1년 6개월의 형 집행은 칼로 나뉘듯이 명확하게 구획되는가. 매번의 판결이 양심에는 부끄럽지 않았어도, 인간인지라 나도 몰랐던 오류(?)는 없었을까. 이를 반추하는 방법으로써 법 감정에 대한 평범한 이들의 시대 공감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면. 검사와 법관이 던진 작은 돌(판결)이 시민의 삶을 암석처럼 누른다면. 작은 오류들에 ‘신이 아닌 법관의 한계’만을 탓할 수 있을까.

AI변호사, AI판사, AI검사가 역사 이래 기록된 모든 판결 관련 기록을 딥러닝하고 변호사, 판사, 검사 이상의 정확하고 분명한 판단을 내려줄 날이 ‘언젠가는’에서 ‘곧’으로 다가오리라 확신한다. 그때, 법의 논리구조와 법정에서 기술되는 모든 구어와 문어의 사전을 구축하고 피의자, 증인, 변호사, 검사, 판사의 상호작용이나 소통 프로토콜을 살펴, 각 변수들의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파악한 후 신경망 이론으로 신의 한 수와 같은 판결이나 변론이 가능하다면, 이 글을 읽는 법조인들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까.

 법은 안정성과 신중함 그래서 신뢰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초연결 사회에서 인공지능 기술이 법의 외곽에 있으리라 안주하는 태도는 자칫 국가 사회에 큰 해악이 될 수 있다. 어차피 다가올 태풍은 피할 수 없다. 혹여나 삶에 안주할 만치 성공한 중년이라면 인공지능 기술의 날카로운 칼날은 비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생들이 중국에서 수입된 책(주자학, 성리학 등 사회구성의 원리를 담은 책)을 읊조리며, 세계 돌아가는 모양새를 중인들에게 맡기고 뒷짐 진 구한말, 나라는 수십 년을 못 견디고 치욕을 맛보았다. 당시 이론이나 철학 아니 법치가 부족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뼈에 사무치는 우리 역사 속에 흘러온 기술에 대한 경시 또는 기술을 아웃소싱하거나 그건 복잡해서 중년의 내가 할 것이 아니라는 외면이 낳은 결과였다.

삶의 경계에 서보지 않고서는, 위태로워져 보지 않고서는 우린 무엇도 다시 세울 수 없다. 필자는 마흔 즈음에 세계를 365일 동안 부유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세계 유수 대학의 R&D 센터와 연구소 캠퍼스를 어슬렁거리며, 공유 기술인 집카, 우버, 에어비앤비 등이 태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후 수년 동안 세계는 법의 외곽에 있던 공유 경제 서비스와 법의 보호를 받던 아날로그 사업자 간의 내홍(內訌)을 지켜보았다. 지금 동남아에 가면 우버를 꺾은 그랩이 있어, 공항에서 호텔까지 구글 지도를 보며 택시를 탈 수 있거나 바가지요금을 걱정하지 않는다. 더러는 유럽에 가서 에어비앤비로 가정식 아침이나 색 바랜 고성에서의 하룻밤을 꿈꿀 수 있다. 최근 우버는 배달 사업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고 자율주행차량을 이용한 택시 서비스에 대한 도전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 모든 낯선 변화들은 법학자를 위시한 사회구성론자들의 다가오는 기술 사회에 대한 적극적 이해보다는 기존 질서에 대한 이해 속에서 기술을 끼워 맞추려는 시도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기술자들이 애써 우수한 거북선을 만들고 수원성을 쌓아 다가올 전쟁에 방비를 하려고 하는데, 법학자들이 뒷짐 지고 방해만 한 결과는 비단 과거 역사책에만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공지능 영화 ‘her’가 먼 나라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법 세계에 안주한 지성인들이 그 테두리를 벗어나 법과 제도의 혁파에 나아가길 기대한다. 다른 나라들이 드론, 로봇, 자율주행차량, 인공지능 등으로 무장할 때, ‘기술이 안정기가 되면 그때 법과 제도를 구비해 보리라’ 라는 심보로는 시대 소명을 다할 수 없다. 지금은 기존의 사회구성 질서나 여타 이념의 시대에서 과학과 실용의 시대로 옮겨왔으니, 그 변화의 큰 물살 위를 서핑하는 법조인이 늘어나길 다시 한번 소망해 본다.

강장묵 부교수/학과장
●글로벌사이버대 AI 융합학과

강장묵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 글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