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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 탐욕, 무지의 역사

 

영화 ‘인터스텔라’는 장중한 음악만큼이나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그린다. 환경의 파괴로 더 이상 식량을 생산할 수 없게 된 지구. 남아있는 인류는 황폐해진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행성을 찾아 이주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그래도 영화는 이런 말을 남긴다.
 

늘 그랬듯이 답을 찾을 거라는 인류.
이 말이 주는 뉘앙스가 서늘하게 느껴진 건 유발 하라리의『사피엔스』를 읽고 나서였다.

이 책은 어쩌면 인류가 늘 그랬듯이 해답을 찾아온 그 길을 거꾸로 되짚어보는 책이었고, 결국에는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온 사피엔스 종의 역사와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종을 ‘살인자의 후예’로 규정한 하라리의 의견이 특유의 입증과 만나는 순간 느낀 송연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사피엔스 종은 늘 주변을 몰살시키면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이어왔다. 소위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을 향한 항해가 학살로 이어질 때 교황청에서는 ‘과연 인디언에게 영혼이 있는가’ 따위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종의 기세가 확장될수록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이를 용인하지 못하는 사피엔스 종의 편협함은 더욱 좁아져 갔다. 같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서, 다른 피부색을 가진,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말이다.

하라리는 인지혁명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인지혁명으로 도구사용,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집단을 이루던 사피엔스 종은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상상을 하고 종교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협력과 조직화는 오히려 보다 작은 조직, 자기와는 다른 유사 생명체는 용인하지 못한다. 지구는 가장 옹졸하고 편협하며 폭력적인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하라리의 시선은 이렇듯 본인이 속한 종에조차 날카롭다. 기술예찬론자들은 농업혁명, 기술혁명이 인류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라리는 농업혁명이야말로 정작 같은 사피엔스 종 사이의 계급과 분란의 씨앗이 되었다고 일갈한다. 동물들은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할 뿐, 배가 고프지 않을 때조차 고플 때를 대비해서 사냥을 해 두지는 않는다. ‘대비’한다는 것은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되고, ‘걱정’에서 비롯된 계획은 ‘만족’이라는 것에 이를 때까지 ‘실행’된다. 문제는 사피엔스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어서, ‘만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정착하지 못한다. 농경시대의 경작과 추수는 사피엔스 종의 이와 같은 상상력이 계획으로 이어지는 초석이 되었다.

책에서 보여주는 농업혁명 이후 사피엔스 종의 행보는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하라리가 농업혁명을 인류 최대의 사기극으로 결론짓기 때문이다. 분명 농업의 발전은 사피엔스 종의 정착과 번성을 불러왔다. 그러나 함께 도래한 것이 사피엔스 종 스스로 넘지 못하는 ‘격차’였다. 생산의 증가에 따른 부는 편중되었고, 생산의 증가에 따라 인구는 늘었다. 부의 편중이 계급을 낳았고, 이를 공고히 했으며 비참함 사이에 종교가 파고들었다.
 


작가는 ‘상상의 질서’를 꺼낸다. 점점 수직적인 서열이 질서가 되면서 사피엔스 종은 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화폐, 제국 그리고 종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이들도 있을 테지만, 하라리의 시각이 흥미로운 것은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조차 알고 보면 종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에 일응 수긍하게 되는 이유는 종교를 앞세워 일어났던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 수백 년이 흘러 발발한 6.25전쟁이나 월남전같이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전쟁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것을 내세우면서 서로 각을 세우고 전쟁을 치르기도 하지만 결국 사피엔스는 농업혁명이래 이룬 진화적 성공과 성공 이면의 비참함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인류’라는 관점에서 상상의 질서 아래 통합되어 갔다.

하라리가 이어서 언급하는 것은 과학혁명이다. 이로써 인간은 더 이상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데우스(신적인 인간)로 올라선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우리의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열리는 것으로 본다. 지금의 사피엔스 종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있다는 하라리의 주장은 인류의 역사에서 ‘혁명’으로 불렸던 사건들,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사피엔스 종의 생존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피엔스 종에게는 생존을 위한 혁명의 과정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공존하던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수많은 동식물의 멸종, 종 상호 간의 학살, 동물의 가축화라는 ‘야만’이 이어져왔다. 그러니 이제 다시금 맞이하는 혁명이 과연 우리에게, 이 지구에 어떤 길을 열어줄 것인지, 과연 천국일지 지옥일지 우려된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 ‘기업과 혁신’이라는 주제의 강의를 듣는데, 강사가 현생인류와 잠시 공존을 했던 네안데르탈인들이 종적을 감춘 이유는 고립되어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혁신, 쇄신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네안데르탈인의 소멸이 어찌 오직 그들의 탓만이라 할 수 있을까? 강의 내내 그 지극한 단순화가 못내 못마땅하고 아쉬웠다.

이 과학혁명의 와중에 인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를 만나 그간 이뤄 놓은 모든 도그마를 의심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코로나19의 등장으로 세계화라는 허상이 얼마나 쉽게 금이 갈 수 있는 것인지, 지금까지의 생활방식, 교육방식 등이 얼마나 보건학적으로 취약했던 것인지, 부의 편중을 구분하지 않는 바이러스가 부가 편중된 세상에서 어떤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지 목도하게 된 것이다.

얼마 전 하라리는 인터뷰에서 “팬데믹(대유행) 시대의 최대 위험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증오, 탐욕, 무지”라는 말을 했다. 그가 말하는 증오, 탐욕, 무지의 역사가 그의 책『사피엔스』에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코로나19를 피해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있는 요즘 같은 시기에 한 번쯤 개인이 아닌 우리 사피엔스 종 자체를 돌아보는 독서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임제혁 변호사
●법무법인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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