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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수전 손택 지음


이 글이 회보에 실려 회원들을 찾아갈 즈음에는 코로나19 확진 증가 추세가 좀 주춤해졌을까? 부디 교회와 광화문 집회발 전염이 어느 정도 수습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 원고를 넘기는 현재 상황은 이런 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엄중하니 말이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 이재원 옮김)』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곧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 멀리 바다 넘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 그리고 이를 기록한 사진들, 그 속에 담긴 참혹함과 이를 대하는 인간의 잔인함을 주제로 한 이 책은 결국 우리의 현 상황과 맞닿아 있다. 바로 ‘연대감’ 이라는 주제의식 때문이다.

코로나19 검사를 요청하러 온 방역 담당자에게 침을 뱉고, ‘너도 걸려봐라’ 끌어안고, 격리중 탈출하여 사람들이 밀집한 곳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이들. 종교적 믿음이 전염병조차 물리칠 수 있다고 정말 믿는 것일까? 본인의 믿음이 그렇다 해도 누가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해쳐도 되는 권한을 주었는가? 이 엄중한 시기에 굳이 집회를 하고, 마스크를 턱스크로 둔갑시키면서 결국 병은 퍼져 나갔다. 정부의 방역 실패를 왜 교회 탓을 하고, 집회의 자유를 행사한 국민 탓을 하느냐고 오히려 억울해들 한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문득 수전 손택이 비판적인 사진 읽기를 통해 제시한 ‘연대감’을 떠올렸다.

매년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에서 퓰리처상 사진전 또는 매그넘 사진전을 연다. 사진을 보는 것도, 찍는 것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사진들 속의 참혹함 너머에 사진을 찍기 위해 목숨을 건 작가들을 떠올리며 숭고함마저 느껴졌었다. 그래서인지 잔혹한 사진들이라고 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대하기가 오히려 어려웠고,『타인의 고통』이라는 책 역시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 숭고한 사진들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인지, 그런 명제가 과연 가능한지 의문을 가진 채 읽어 나갔다.

얼마 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엄청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의 영상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이전에도 IS의 참수 동영상이 믿을 수 없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퍼져 나간 일도 있었다. 아마 이러한 영상을 보면서 끔찍하다고 몸서리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영상을 보기 전에도 이미 어떤 영상일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자체로 끔찍한 일임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영상으로 확인하면 그 끔찍함이 배가될 것임도 안다. 한데 어째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잔혹한 경험을 자처하며 조회 수를 올리는 것인가?

타인의 고통이 역력하게 담긴 사진과 영상이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긴다는 이 기이함은 인간의 어떤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수전 손택은 에드먼드 버크의 설명을 빌려 ‘관망’이 주는 ‘쾌락’을 언급한다. 타인의 고통은 ‘정신적 고양감’을 주는 자극이 된다는 것이다. ‘정신적 고양감’이라는 이 그럴듯한 말의 뜻은 고통을 받는 대상과 이를 바라보는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감이 존재하고, 바로 그 거리감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나는 그 행위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무고함’ 을 느낀다는 것이다.

선뜻 수긍이 가지 않았다. 나는 분명 끔찍한 영상을 보게 되었을 때 분노를 느꼈을 뿐 그러한 폭력에 동의하거나 쾌락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절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지 않았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이 부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책 154면)

‘연민’ 은 내가 저들의 상황에 놓여있지 않다는 안도감의 또 다른 측면인 것이다. 그 안도감을 ‘연민’이라는 단어로 느끼든, ‘분노’라는 단어로 표현하든, 나는 이미 내가 느끼는 감정의 기저에 안도감이 깔려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그들의 고통을 소비한 것임을 매우 불편한 심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이런 반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그런 사진은 아예 보지도 말라는 얘기인가?’, ‘사진을 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라는 것인가?’ 그러나 수전 손택이 문제 삼는 것은 개개인의 감정이 아니다. 이렇게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이 점점 더 광범위하게, 점점 더 무디어져 가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뉴스는 점점 더 자극적인 보도가 줄을 잇고, 시사교양 프로그램조차 살인과 같은 잔혹 범죄가 아니면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 수 없다. 누구나 마이크를 들고 쉽게 방송을 할 수 있는 요즘, 구독자와 조회 수를 올리기 위해 더 잔혹하게, 더 자극적으로 제작되는 개인 방송들을 매일 목도한다. 타인의 고통은 소비될 뿐이며, 이 추세는 미디어의 발달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누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지 않고 공감하는가? 대형 폭발이나 집단 학살, 참수와 같은 잔인한 장면을 시청한 이들 중 그들의 고통을 소비하지 않은 이들은 없다. 어떻게 알아차리고, 어떻게 멈출 것인가.

수전 손택이 사진을 통해 던진 화두는 ‘사진은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게 할 수는 있지만, 공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이 나에게 안도감을 준다는 것은 절연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나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공감하고,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행동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병에 걸린 이들의 괴로움, 치료하고 회복하는 과정의 어려움뿐 아니라 상당한 후유증도 함께 보고되는 이 엄중한 상황. 방역의 최전선에서 바람조차 통하지 않는 방호복을 입고 올 초부터 이 끔찍한 여름을 지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면서도 어찌 되었든 남일이라며 이들의 고통을 소비한 것은 아닐까? 일부러 침을 뱉고, 껴안고, 마스크를 벗어 젖히며 마이크 앞에서 연설을 하는 이들에게 분노하면서도 돌덩이가 매달린 듯 얹힌 느낌이 든다. 수전 손택이『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을 통해 전한 주제는 사진이나 영상을 대하는 내내 불편함을 준다. 그 불편함이 틀리지 않기에 더욱 불편한 마음이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해 버리는 쉬운 방법을내려놓고, 그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연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당장 고민해 볼 일이다.

임제혁 변호사
●법무법인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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