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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송무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필자는 한 디자인권 침해사건을 수임하게 되었다. 의뢰인은 자신이 직접 개발한 전자제품을 대형 할인마트의 전 지점에 설치하기로 하는 큰 계약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였는데, 기존에 그 마트와 거래를 하고 있어 마트와의 거래가 중단될 위기에 처한 한 업체에서 그 제품 관련 의뢰인이 자신의 디자인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해 온 사건이었다.

 사실, 문제의 그 제품은 다소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몇 개의 곡선과 직선의 결합을 그 구성으로 하고 있어, 이것을 문언으로 어떻게 구체화를 시켜야 할지 고민일 만큼의 단순한 디자인이었지만, 물품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고, 그런 디자인과 그러한 물품이 결합된 사례는 처음이었기에, 자칫 상대방 디자인권의 권리범위가 상당히 넓게 해석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물품을 공급받기로 한 거래처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는 사건이었기에 패소하는 경우 향후 의뢰인의 영업에 상당한 부정적 연쇄효과가 예상되었다.

 이와 같이 중대한 이익이 걸려 있는 사건이었기에, 의뢰인은 매 기일마다 변론을 참관하셨는데 (무려 직원 두 분을 대동하셔서 말이다), 당시 송무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필자로서는 변론 시 방청석에 앉아 필자를 향하고 있을 의뢰인의 따가운 시선을 뒤통수로 느끼며 혹시나 의뢰인 앞에서 창피한 모습을 보이게 되지는 않을까, 재판부로부터 꾸중을 듣지는 않을까 늘 노심초사였다.

 당시 의뢰인은, 그 무렵 모 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이던 <동네변호사 조들호>라는 드라마의 열혈 팬이셨는데, 밋밋한 변론을 끝내고 법원을 나오는 날은 필자에게 “왜 변호사님은 조들호처럼 하지 못하십니까, 아니 왜 재판정을 다 뒤집어엎고 나오지 못하십니까..”라며 아쉬움을 표하셨다. 당시 드라마 속 조들호 변호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위험한 현장에 잠입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 법정에서는 쩌렁쩌렁 호통을 치는 변론을 하여 방청객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 내기도 하는 열정의 화신이었다.

 필자는, “이 디자인과 저 디자인은, 측면에서는 유선형 곡선의 곡률이 다르고 측면과 정면부가 연결되는 경계면 형상의 미감이 다릅니다” 등등의 변론을 하여야 하는 이 사건에서, 마치 이러한 곡률과 형상의 대비가 이 세상 정의와 연결되어 있는 양 재판정을 들썩이게 하는 그런 변론은 할 수가 없다고 의뢰인에게 변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 조들호를 보고 싶어 하는 의뢰인의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보며 차마 그런 실망스러운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들호 같은 열정을 의뢰인에게 보여 보자 마음속 다짐을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재판장님께서 상대측 디자인의 포인트 하나를 언급하시면서 이런 형태에 이런 기능을 가진 선행 디자인들을 찾아서 제출해 보라는 엄명을 내리신 것이다. 드디어 나의 열정을 보일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던 필자는 밤을 새워 일본, 미국, 유럽 등 전 세계 특허청 사이트와 관련 사이트들을 뒤지며 100개가 넘는 선행 자료를 찾아냈다. 자료를 정리하고 번역 내용까지 확인하다 보니 정리에만 수일이 족히 걸렸지만, 힘들기는커녕 신이 났다.

 의기양양하게 그 같은 자료들을 찾았음을 의뢰인에게 알리고 법원에 제출한 후, 칭찬받을 기대에 부풀어 다음 기일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기다리던 기일 당일, 재판장님께서는 당황과 가벼운 수준의 분노 중간 어딘가쯤 되는 표정을 지으시면서, 이 증거들을 철회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후 경험이 쌓이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디자인권뿐만 아니라 특허권 등 지식재산권 소송에서 비교대상 문헌을 제시해야 할 경우 증거가치가 높은 몇 개의 증거에 집중하여 변론을 진행하는 것이 통상이다. 유사한 것이 100개라면 그중 가장 유사한 것 하나를 가지고 대비를 하는 것이 당연히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재판부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패잔병처럼 법정을 나서면서, 이제 이 의뢰인과 다음 사건에서는 볼 일이 없겠구나 망연자실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웬걸, 의뢰인의 반응은 나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의뢰인은 아마도 판사님께서 어젯밤에 사모님하고 다투셔서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다며 필자를 위로해 주시고, 너무 열심히 증거를 찾아 주어 감동 받았다며 오히려 격려를 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재판이 끝난 후 그리 시원하게 웃는 의뢰인의 표정을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 역시 판사님으로부터 혼이 나야 조들호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뒤로도 필자는 조들호와 같은 사이다 변론을 해 보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의뢰인이 나를 그의 ‘동네변호사’로 인정해 주기 시작하였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몇 번의 난관을 더 넘어 결국 그 사건에서 승소를 하였고, 항소심에서도 무사히 승리를 의뢰인에게 가져다줄 수 있었다. 증거 100개를 찾은 것에 감동하신 의뢰인은 ‘조들호 정도는 아니지만 조들호가 될 가능성은 엿보인다’면서, 필자에게 회사의 법률자문을 맡기고 현재까지도 좋은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

 가끔, 그 의뢰인을 뵐 때면 그런 상상을 한다. 만약, 조들호가 지식재산권 소송을 하는 변호사였다면, 흑과 백이 분명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권리의 경계선을 긋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면, 그는 과연 어떤 변론을 할까. 쉽게 그려지는 그림은 아니다. 어쨌든 변호사는 주어져 있는 사실, 증거를 넘어서서 현실을 가공하는 일은 할 수 없고, 우리가 법을 통해 다투는 일들의 면면은 때론 다큐멘터리처럼 밋밋하기도, 때론 과학 잡지처럼 건조하기도 하니, 늘 조들호 같은 짜릿함을 의뢰인에게 안겨 주는 변호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법정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열띤 구두 변론이 되었든, 전 세계를 한 바퀴 돌아오는 증거 찾기의 과정이 되었든, 의뢰인을 진정 감동시키는 것은 사건과 의뢰인을 위한 변호사의 열심과 정성이라는 것. 그것이 어떤 사건이 되었든, 사건에 쏟을 뜨거운 마음이 장전되어 있다면 이미 우리는 누군가의 조들호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황유현 변호사 ● 법무법인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