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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준 변호사 인터뷰


Q. 안녕하세요, 유기준 변호사님. 바쁘실 텐데 시간 내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우선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지금 당장은 제가 변호사로 불리는 것이 다소 생소하네요. 변호사를 하다가 정치를 하러 가서 16년 동안 있다가 재작년에 나왔습니다. 그 사이 좀 쉬다가 법무법인 삼양 대표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서울사무소를 오픈한 지도 일주일밖에 안 되었네요. 2004년부터 2020년까지 4선 국회의원을 했고, 해양수산부 장관도 지냈는데, 어떻게 보면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해 가면서 변호사 입장에서는 새롭고 다양한,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면서 역동적으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Q. 해상전문변호사가 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변호사를 처음 시작한 것이 1988년이었습니다. 그때는 대학원 수료하고 뭘 할까 고민하던 때였는데, 해상 분야가 변호사 숫자도 많지 않아 다들 관심이 많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향도 부산이라 자연스럽게 무역, 선박, 운항에 평소 관심이 많았는데, 적극적으로 그쪽 일을 계속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엔가 해양ㆍ수산전문변호사가 되어 있더라고요(웃음). 자기 스스로 ‘난 해상전문변호사다’라고 선언을 한다고 해상 변호사가 되는 것은 아니고, 그에 맞는 자격이라든지 경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1988년 7월에 미국 유학을 가서 뉴욕대학에서 LLM 과정을 마치고 미국 내 해상 전문 로펌인 힐리 앤 베일리(Healy & Baillie)에서 1년가량 근무했습니다. 귀국 이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해상 변호사로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게 1990년 초부터였으니,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Q.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집사람과 2녀 1남입니다. 큰 딸은 결혼했고, 작은 딸은 회사에 다니고, 아들은 군 제대 후 복학해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네요.

Q. 자제분이 커서 변호사가 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건지요?

 큰 딸은 이미 변호사입니다(웃음). 현재 사내변호사로 일하고 있지요. 본인이 변호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 뭘 하든지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아들은 막내여서 복학 후 곧 졸업인데, 아들도 변호사 생각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쉬운 일은 아니니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Q.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있으실까요?

 제 대학 생활 당시에는 70년대 말 유신 말기라서 다들 정치 현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학생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지요. 그때 학생운동을 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 문제도 많이 느끼게 되었고, 그걸 바로잡는 것이 정치 참여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2004년에 기회를 얻게 되어 비로소 포부를 가지고 초선 국회의원이 되고자 출마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으면서 불공정과 비정상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는데, 사회 전체에도 그러한 불이익과 불공정이 똑같이 존재하는 것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사회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니, 정치를 통해서 이를 실천하고자 정치에 입문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Q. 법무법인 삼양이란 무슨 뜻인가요?

 삼대양의 줄임말입니다. 전 세계 5대양 중 북빙양, 남빙양은 배가 다닐 수 없고, 배가 다닐 수 있는 나머지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일컬어서 삼양이라고 해요.

Q. 해상전문변호사로 유명하신데, 변호사 시절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업무가 있으셨는지요?

 많이 기억이 납니다. 해상 관련해서 여러 가지 업무들을 참 많이도 했네요(웃음). 오래전이긴 하지만 미군이 우리나라에서 훈련을 하다가 포항에 있는 어장을 망가뜨리는 바람에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한 사건도 기억이 나네요. 그때 소멸시효 만료 일주일 전에 미국 뉴욕 법원에 소를 제기해서 결국 손해배상을 받아냈었습니다. 그게 90년대 중반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예인선과 부선이 같이 다니다가 선박 사고가 났을 때 책임 제한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 대법원까지 가서 판례를 만들었던 사건도 기억이 납니다. 보통 해상 사고 시에는 톤수를 기준으로 산출된 금액을 최고한도로 해서 선주의 책임을 제한하는데, 예인선 뒤에 부선이 끌려가다가 두 척 다 사고를 내면 책임 제한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기존에 판례가 없어서 대법원까지 가서 판례를 남긴 사건이었지요. 저희는 예인선과 부선 별도로 톤수를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대법원은 결국 톤수를 별도로 계산해서 합쳐야 한다고 판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래전의 일이긴 합니다만, 러시아 명태잡이 선박들이 유럽은행에 파이낸싱을 받아서 오호츠크해나 베링해에서 조업을 하고, 그 조업으로 번 돈으로 매월 유럽은행에 원리금 상환을 해야 하는데, 조업이 잘 안 돼서 갚지 못하자 결국 유럽은행이 우리나라에 입항한 선박 십여 척을 압류했던 사건도 기억이 납니다. 저희가 러시아 선주 측을 대리하여 그 사건을 수임했는데, 당시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그 러시아 선박회사에 직접 가 보니까 그 사건이 거기서는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어 있더라고요. 명태나 명란 생산이 안 되니까 그 회사 공장 근로자들이 월급을 못 받아서 생계 문제로까지 번진 거였죠. 그래서 법원에 사정 설명을 잘 해서 압류된 선박 중 일부에 대하여 압류를 해제시키고 경매를 중단시켰었는데, 단순히 법리로만 판단하지 않고,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계 문제나 사회적 문제까지 고려해서 사건을 진행했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네요.
 


Q. 국회의원이나 장관으로서의 활동 중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업무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국회의원은 민의의 대변자 역할이 제일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입법기관으로서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생활하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입법을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업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민원도 많아서, 예산, 정책으로 민원을 뒷받침하는 것 역시 국회의원의 업무에 속하죠. 기억에 남는 업무로는, 제 지역구가 부산 서구라서, 우리나라 첫 번째 공설 해수욕장인 서구에 송도해수욕장 민자를 유치해서 케이블카를 설치한 것이라든지, 현재 진행 중이기는 한데, 부산에 우리나라 고등어 생산 90% 이상을 담당하는 공동어시장의 현대화 사업을 추진했던 것 등이 있네요.

 해수부 장관도 10개월가량 했었는데, 수산인들, 어업인들은 농업인들과 다르게 대출 시 정책금리가 4%대로 매우 높아서 형평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수산인들과 어업인들도 농민 수준인 1%대로 대출 금리를 낮추었던 일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리고, IMF 때 수협은행이 경영이 많이 어려워져서 1조 원 이상의 정부 자금을 지원받은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를 자본으로 전환시켜서 수협은행 경영을 정상화했던 기억도 나고요. 국회의원을 하면서도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과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도 하면서 사법 체제도 다듬었고, 외교통일 관련 중요한 업무도 여러 가지 했었네요. 그때 국제해사기구(IMO) 사무총장 선거에 우리나라 사람인 임기택 씨가 출마했었는데, 처음에는 3등, 4등을 달리던 후보를 적극 지원하여 당선시켜서 아직도 IMO 사무총장을 하고 계십니다. 40여 개 회원국의 선거를 진두지휘했던 일은 정말 보람찬 일이었어요.

Q. 여가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취미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정상적인 것이 가능하지가 않은 시기네요. 그럼에도 여가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 정말 중요합니다. 전에는 등산을 많이 다녔는데, 요즘은 겨울이라 산책 같은 다른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Q.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시나요?

 스트레스는 풀릴 수는 없는 것 같고,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음악을 많이 듣는 것 같아요. 대중음악, 팝송, 클래식 등 다양하게 들으면 마음이 정화됩니다. 요즘에는 비발디 사계 한번 꼭 들어 보세요(웃음).

Q. 가족분들은 어떤 직업을 더 좋아하시나요?

 아내는 정치인의 부인으로서 한 16년 동안 내조를 했으니 정말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지금은 정치를 안 하니까 좋아하는 것 같아요(웃음). 정치를 할 때에는 주중에는 여의도, 주말은 지역구에 가니까 가족들 얼굴 볼 틈이 없었지요. 정치 초기에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이제는 어느덧 대학 입학에 군대 제대까지 해 버렸네요. 정치하는 기간 동안 가족들 얼굴을 많이 못 봤어요.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말 보람 있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신가요? 정치인으로서의 끈도 놓지 않고 계속 이어 나가실 생각이신지요?

 사실 지난 20대 총선을 끝으로 일단 정계 은퇴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알 수 없는 거라서 완전히 그 끈을 놓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든 저를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임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Q. 변호사로서 정치인의 길도 같이 걸어오신 모습은,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후배변호사들에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롤 모델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변호사 숫자가 많이 늘어나면서 국회 업무나 정치 쪽으로도 관심을 가지는 분들도 많아지는 것 같은데, 이런 분들에게 조언해 주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우리나라도 법조인 선발이 로스쿨 제도로 바뀌면서 변호사들이 많이 배출되기 시작했고, 그분들 중에서는 현실정치에 뜻을 두는 분들도 많은 것 같네요. 저는 아주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도 정치인들 중에 변호사들이 많이 있는데, 미국의 상황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보면 좀 더 훌륭한 인재들이 현실정치에 참여를 해서 인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변호사로서 정치를 하려면 사회 현상에 대해서 연구나 관찰을 하면서 잘못된 제도를 바꿀 수 있는 문제의식도 꾸준히 가지고 가야 합니다. 입신양명을 위해서 정치를 하는 것은 보람이 없기 때문에 오래 할 수도 없어서 권하고 싶지 않아요. 사회가 당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해야 오래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변호사 업무는 하다 보면 사회 문제를 느낄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어서, 저는 변호사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Q. 끝으로, 새로이 법조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해 나가는 젊은 후배변호사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소위 꼰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치부해 버리면 사실 자기 자신한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말씀 꼭 드리고 싶어요. 지금 젊은 변호사님들은 세상을 좀 급하게 살려고 하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과정과 절차와 시간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도, 몸도 너무 급하게 가지지 말고, 충분한 시간 동안 과정과 절차를 거친다고 생각하시면 마음이 급해지지 않을 거예요. 이제 법조인이 된 지 3년, 5년도 채 안 되었는데, 다른 기성 변호사와 비교할 만큼 성장하는 건 애초에 도저히 불가능한 거예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목표의식을 가지고 꾸준한 노력을 병행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우리 젊은 변호사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생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바뀌는 거더라고요. 결과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거니까, 원하는 결과만큼의 상당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것, 꼭 명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인터뷰/정리 : 고정욱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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