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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지만 잘 싸웠다”


 4월 10일, ‘코리안 좀비’ 정찬성 선수의 챔피언 결정전 경기를 지켜보는 국내 UFC 팬들에게는 만감이 교차하는 밤이었다. 결과는 아쉽게 정찬성의 TKO 패배였지만, 누구도 그의 패배를 두고 ‘준비가 부족했다’는 등의 쓴소리는 하지 않았다.

 경기를 마친 정찬성 본인 역시 인터뷰를 통해 “아쉽거나 후회되거나 그래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후련하다”라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그 후 업로드된 SNS 속 정찬성의 얼굴은 상처 투성이었지만, 입가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야말로 ‘졌잘싸’ 했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는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에게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었으나 아쉽게 패배했을 때, 그리고 그 결과를 승복하는 자에게 쓸 수 있는 굉장히 제한적이고도 영광스러운 단어이다.

 문득 재판이라는 승패의 부담을 지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나는 ‘졌잘싸’ 하는 쪽인지, ‘꾸역승(말 그대로 졸전을 펼치고도 겨우 승리하였다는 비하적 의미의 말)’ 하는 쪽인지 생각에 잠겨 본다.

 한 의뢰인께서 찾아와, 본인이 오래전 사고를 당하여 가해자로부터 치료비만 겨우 받았었는데,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 나니 위자료를 받지 못한 일이 몹시 억울하게 느껴진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의 단기소멸시효 3년’부터 떠올라 속으로는 ‘어렵겠는데’ 했지만, 일단은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았다.

 그런데, 그 의뢰인은 변호사사무실이며 무료상담기관이며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라면서, ‘소멸시효 지난 것도 다 안다’, ‘왜 당사자인 내가 괜찮다는데, 본인들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냐. 내 일처럼 열심히 싸워 줄 변호사님 찾으러 온 거다. 져도 되니까 부담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열정이 과다한 것도 인정한다만, 무엇보다 이 사건에 최선을 다해 ‘당신이 그동안 변호사에 대해 잘못 생각하셨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큰 고민을 하다가 그 사건을 수임하였고, 해당 의뢰인께서는 패소하였다. 사실 아무리 열심히 싸웠다고 해도 패배는 패배다. ‘졌잘싸’라는 말 같은 건 그저 ‘정신승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의뢰인께서는 “해 볼 수 있는 것 다 해 보았으니 결과와 상관없이 속이 후련한 느낌이다. 이 소송을 하지 않았더라면 죽기 전까지 후회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오히려 날 위로하는 듯한 말이었다. 부당한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는 승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정당한 심판을 받아 보고 싶을 뿐일 수도 있겠구나. 때로는 의뢰인들께 ‘이런 주장 안 된다’고만 말하지 말고,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일단 부딪쳐 보겠습니다’라고 하는 깡도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무릇 재판이란 것을 운동경기에 비견하여서는 안 되겠지만, 변호사로서 의뢰인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캐치하여 필요한 주장과 증거를 모두 서면에 담아냈을 때, 또 이것이 재판부에 명확하게 전달되었을 때, 의뢰인 역시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보았으니 이제는 져도 여한이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렇다면 변호사 스스로도 ‘졌잘싸’ 했다며 만족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공이 깊은 의뢰인을 만난 덕분에 단순한 승패를 넘어, 어떻게 싸울지를 더 깊이 고민하는 변호사가 되자는 작은 목표가 생겼다.

 결과가 있는 일에 어찌 과정이 중요치 않은 일이 있겠는가.

 

최유진 변호사
● 법무법인(유한) 서울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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