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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의 말속에서 실마리를 잡다


 변호사라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찾아온 의뢰인을 변호해야 하는 상황을 한 번쯤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필자도 그러한 경험이 있어 그 소회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지인의 소개로 한 건물 소유자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았습니다. 의뢰인은 제 또래 젊은 여성분이었고, 건물을 임대하였다가 임차인으로부터 수억 원의 공사대금청구를 당한 상태였습니다. 의뢰인은 이미 무변론 패소 판결을 받은 상태였고, 임차인이 1심 판결에 기하여 강제집행신청까지 하면서 건물이 매각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의뢰인의 주장은 자신은 임차인의 공사에 동의한 적 없고, 임차인이 주장하는 공사금액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건물주의 동의 없이 건물에 대대적인 공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쉽게 상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습니다.

 또 의뢰인은 합의 당시 현장에서 ‘원상회복조항이 있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의뢰인은 계약서를 분실한 상태였고, 임차인이 제출한 계약서에는 원상회복조항이 없었습니다.

 필자는 항소장과 강제집행정지신청서를 제출하는 한편 항소이유서를 작성하면서 의뢰인의 주장을 어디까지 담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비록 증거는 없었지만 내막을 들었을 때 의뢰인의 말에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고, 고심 끝에 의뢰인의 주장을 서면에 고스란히 담으면서 어려운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한참 진행되던 와중에, 의뢰인은 임차인이 제출한 계약서 작성 이후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했던 사실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서를 작성했던 공인중개사에 대한 증인 신문을 통해 당시 사용된 계약서 양식을 현출해 냈고, 그 계약서에는 의뢰인을 살릴 강력한 방어무기인 ‘원상회복조항’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의뢰인에게는 워낙 오래전의 일인 데다 계약서를 잘 관리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는데, 재판부와 상대방 모두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짐작됩니다.

 경위야 어떻든 이제 기존 계약서를 탄핵하고, 새로운 계약서를 주장 · 입증할 일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난관이었습니다. 임차인은 뒤늦게 위 새로운 계약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기존 계약서의 작성일자가 공란으로 된 점을 지적하면서 기존 계약서가 더 나중에 작성되어 효력이 우선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필자는 사전에 계약서 작성일자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정황증거로, 당시 약속을 잡기 위해 주고받은 대화 내역과 카드 내역 등을 확보했고, 묻혀 있던 ‘원상회복조항’ 카드를 침착하게 살려 냈습니다.

 이로써 의뢰인은 공사대금 지급의무에서 벗어나고, 무모해 보였던 항소이유서는 진실한 서면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만약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변호사가 사전에 의뢰인의 주장을 걸렀다면 뒤늦게 원상회복조항에 대한 주장을 했더라도 실기한 공격방어방법으로 각하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원상회복조항에 대한 진실은 가려졌지만, 정의는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임차인이 제출한 또 다른 특약서상에는 “공사대금을 차임에서 차감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의뢰인은 연체 차임을 지급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의뢰인은 위 특약서에 날인한 기억이 없다고 했지만, 상대방이 인영감정을 진행한 결과 의뢰인의 인감도장 인영과 동일함이 인정되면서 진정 성립이 추정되었습니다. 의뢰인의 인감도장은 막도장이었고 보관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의뢰인이 날인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주장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재판부는 공사 동의 여부에 대하여도 묵시적인 동의 내지 승낙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필자는 공사대금에 대하여 세목별로 하나하나 다퉜고, 이로 인해 상대방이 건축 감정을 진행한 결과 공사대금이 일부 감액되었습니다.

 착수 당시 증거가 없어 막막하기만 했던 사건이 뜻밖의 전개와 치열한 공방전을 치른 끝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필자가 소송 막바지에 퇴사하면서 다른 변호사가 바통을 이어 받았고, 의뢰인이 판결문을 받아 필자에게 전달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반쪽짜리 승리였습니다. 의뢰인의 재산상 출혈을 전부 막지는 못했지만, 공사대금청구를 막아 건물이 강제집행되는 큰 위기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증거 없는 사건은 없고, 증거의 실마리는 바로 의뢰인의 말속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돌이켜보니 그전에는 의뢰인의 말보다는 서증을 통해 사안을 파악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송에서 의뢰인과 마주하며 그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은 바로 변호사입니다. 의뢰인의 말에 마음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일은 변호사의 첫 번째 본분인 것입니다. 의뢰인도 필자가 본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필자와 의뢰인의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규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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