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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마음을 합한 성, 중심성

 인천둘레길 1구간을 걸었다. 인천둘레길 1구간은 계양산을 한 바퀴 도는 코스다. 계산역에서 내려 계양산으로 접근하니 예전에 계양산을 찾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박물관이 보인다. 계양산성 박물관이다. 전에 계양산을 오를 때 한창 발굴조사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2000년대 들어 도합 10차례 발굴된 유물을 모아 2020년 5월에 박물관을 열었다고 한다. 계양산에 오르면 왼쪽으로 서해, 오른쪽으로 한강이, 그리고 그 사이로 김포의 야산들과 들판이 펼쳐져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계양산(395m)은 이 근처 한남정맥의 산 중에는 제일 높다. 한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안성 칠현산에서 갈라져 나와 서북쪽을 향해 올라오다가 인천시를 가로지른 후 한강 입구의 문수산에서 바다로 자맥질한다. 그런데 계양산에서 삼각형 모양으로 솟구친 한남정맥은 그 후부터는 고만고만한 작은 산으로 이어져가기에, 계양산 정상에서 김포를 바라보면 눈앞이 확 뚫리며 가슴이 시원한 것이다. 눈앞이 확 뚫린다는 것은,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 들어서기에는 딱 좋은 곳이란 얘기이리라. 그래서 계양산에는 삼국시대부터 산성이 있었다. 역사에 자세한 기록은 나오지 않으나 삼국시대의 성이라면 백제의 성이지 않았을까? 물론 고구려 전성기에는 고구려의 성이었을 테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이 병신년에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의 성들을 공략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공략한 성 중에 미추성이 나온다. 미추성은 미추홀을 말하고 미추홀은 오늘날 인천 바닷가 지역을 말할 테니까, 당시에는 백제가 계양산성에서 고구려의 침입을 경계하지 않았을까? 물론 자세한 역사 기록이 없어 순전히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긴 하지만...

 계양산성 박물관에서 오른쪽으로 하여 인천둘레길 1구간을 걷는다. 1구간을 3/4 가까이 걸었을 때, 계양산과 중구봉을 잇는 징맹이고개를 지나게 된다. 징맹이고개! 이름이 특이하다. 고려 충렬왕 때 이 근처에 매를 관리하는 관청인 매방이 있었다고 한다. 원나라가 고려의 매인 해동청(海東靑)을 공물로 요구하여, 매의 사냥과 사육, 조공(朝貢)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매방 또는 응방(鷹坊)을 둔 것이다. 징맹이고개는 이러한 매들을 징발한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지역에 매가 많아서 매방을 둔 것인가? 아니면 제물포를 통하여 원나라에 공물을 보내기 위해 이곳에 매방을 설치한 것인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나, 내 눈에 들어오는 매는 한 마리도 없다. 징맹이고개는 천명고개라고도 불렀다. 징맹이고개는 고개가 길고 나무가 울창하여 도둑들이 숨어있기에 좋은 고개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안전하게 징맹이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1,000명이 떼를 지어 넘어야 한다고 하여 천명고개라고도 부른 것이다. 물론 1,000명을 채워서 넘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넘는다는 것이리라.

 그런데 지금은 8차선 도로가 그렇게도 울창했던 나무들을 싹 밀어내고 징맹이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도로가 한남정맥을 싹둑 자르고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계양산에서 중구봉으로 이어서 산행할 때 횡단보도를 찾아 고개 아래까지 내려가야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지금은 8차선 도로 위를 바로 생태다리로 연결을 해놓아, 편하게 중구봉 기슭으로 넘어갈 수 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오로지 경제발전에만 눈이 벌겋던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로를 놓더라도 한남정맥의 맥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기나 했겠는가? 그러니 전국의 9개 정맥뿐만 아니라 백두대간도 여기저기 마구자르며 도로를 냈지. 그러다가 뒤늦게 근래에 와서야 끊어진 맥을 잇기 위해 이렇게 생태다리를 놓는다고 유난을 떨고 있는 것이다.

 생태다리 앞에는 ‘중심성 터’라고 새겨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예전에 이곳에 징맹이고개를 중심으로 동서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중심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심성은 고종이 1883. 10. 경 칙령을 내려, 부평부사 박희방이 주민들을 동원하여 쌓은 성이다. 1883년이면 조선 개화기 때인데, 내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성 중에는 가장 늦게 만들어진 성이다. 그 당시 이곳에 새로운 성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쇄국정책을 펼치던 조선의 앞바다에 이양선이 출몰하더니만, 급기야는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고, 뒤이어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 초지진과 건너편 김포의 진들을 점령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요구하여 조선은 어쩔 수 없이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굳게 닫혔던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뒤를 이어 구미열강에도 문을 열어주어야 했고... 그러면서 인천에는 이들 열강의 조계(租界)가 차례로 들어서게 된다. 왜이(倭夷)와 양이(洋夷)가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으로 들어오고 있으니, 고종으로서는 우환거리가 바로 옆에 있다고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인천의 오랑캐들이 서울로 오려고 할 때 넘어야 할 고개가 징맹이고개다. 그래서 고종은 이런 우환을 미리 방비하고자 징맹이고개에 성을 쌓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1884년 1월에는 부평에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신설하여 이곳의 방비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런데 이름이 왜 중심성(衆心城)인가? 민중이 마음을 합하여 쌓은 성이라, 중심성이라고 한다. 민중이 마음을 합하여 쌓은 성이라... 보통 왕조국가의 성이라면 백성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쌓은 것이 먼저 연상되는데, 민중이 마음을 합하여 쌓은 성이라고 하니, 그 이름이 아름답기까지 하구나. 그만큼 당시 백성들도 왜이와 양이의 침입에 위기감을 느끼고 한마음으로 단결하였던 것인가? 가만있자... 당시 성을 축조한 박희방 부사가 백성들의 진심을 확인하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일방적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닐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진실은 알 수 없으니, 좋은 쪽으로 해석하자. 중심성이라는 이름 자체가 역사에서는 보기 드문 성 이름이니, 그런 점에서 민중의 마음이 담긴 성이라고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헌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직 ‘중심성 터’ 표석만 보일 뿐, 이런 민중의 마음이 담긴 성터는 다만 일부분이라도 보이지 않는다. 중심성이 방어하려던 오랑캐에 왜이(倭夷)도 있었으니, 아마 일제 강점기 중심성은 이미 무너지고 점차 유실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이곳의 성벽 돌들을 다른 곳에 공사하는 데 사용하였고(미군들이 가져다 사용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그나마 남아있던 중심성 터도 이곳에 도로를 내면서 다 없어졌을 것이다. 요즘이야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보존을 위한 법령을 지켜야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생각조차도 없을 때가 아닌가? 비단 중심성뿐인가? 인천의 문학산에 있던 문학산성도 문학산 위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때에 무시되고 파괴되었다. 내 모교인 경기고교가 이전한 강남 한강변의 작은 수도산에도 수도산성이 있었지만, 모교 이전 공사 시 수도산성 유적지 조사를 먼저 한다는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뿐인가? 청계천의 광교도 청계천 복개공사할 때 그대로 어둠 속에 유폐되었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야 겨우 햇빛 속에 숨을 쉴 수 있지 않았는가? 한편 서울의 사대문 안을 걷다 보면 곳곳에 예전에 이러이러한 유적이 있었다는 표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런 표석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 표석이 알려주는 유적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서울은 지금 옛 문화의 숨결이 살아있는 수도로서 세계인의 관심과 사랑을 더욱 끌지 않았을까? 단순히 그때는 먹고살기 바빠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는 변명으로 넘기기에는 사라진 문화유적들이 너무 아쉬운 것이다.

 걷다 보니 어느새 계양산성 박물관 앞에 다시 왔다. 이제 계산역으로 향한 내리막길로 발걸음을 돌린다. 도로에는 여전히 계양산을 향하는 사람들과 계양산을 뒤로 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이들이 140년 전 힘을 합쳐 중심성을 쌓았던 이곳 민중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담아가면 좋으련만...

양승국 변호사
● 법무법인(유한)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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