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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과 스티브

 아일랜드 남부의 작은 목가적 마을인 킬라니(Killarney)에서 자란 조각 같은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Michael Fassbender)와, 그레나다와 트리니다드 출신의 이민자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평생 런던 토박이로 자란 영화감독 스티브 맥퀸 경(Sir Steve Rodney McQueen, 맥퀸은 2020년 영화예술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사이에는 얼핏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영화예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국적과 나이뿐 아니라 인종이라는 장벽을 뚫고 굳건한 우정을 쌓았으며, 그 우정을 토대로 관객들의 마음속에 길이 남을 세 편의 영화를 남겼다.

 패스벤더와 맥퀸이 최초로 협업했던 작품은 2008년 개봉한 영화 <헝거(Hunger)>였다. <헝거>는 그전까지 영상예술 및 단편 독립영화 감독이었던 맥퀸이 본격적인 상업·장편영화의 세계로 들어서는 계기인 동시에, 2007년 개봉한 액션 영화 <300>에서 수려한 외모로 관객들의 눈에 든 패스벤더가 자신의 연기력을 증명하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에서 패스벤더는 북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될 것을 주장하며 무장투쟁을 벌인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조직원 바비 샌즈(Bobby Sands)를 연기했는데, 극 중 메이즈 감옥(Maze Prison)에 갇힌 샌즈는 수감된 IRA 조직원들이 죄수가 아닌 정치범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죄수복을 입거나 노역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감옥 내에서 시위를 벌인다. 그러나 시위를 벌이는 IRA 조직원들에게는 교도관들의 가공할 폭력이 가해진다. 죄수복을 입기 거부하며 담요만 덮고 나체로 시위하던 IRA 조직원들은 구타당하고 삭발당하며, 곤봉 세례와 더불어 수치스럽고 고문에 가까운 신체수색을 당한다. 수감자들에 대한 가혹한 폭력을 주도하는 교도관 로한(스튜어트 그레이엄)은 영화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며 어떠한 인간적인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데, 맥퀸은 일체의 감정이 말살된 로한을 통해, 타인의 인간성을 억압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자신의 인간성도 부정하게 됨을 암시한다.

 결국 기존의 방식으로는 영국 정부로부터 어떤 승리도 거두지 못할 것임을 깨달은 샌즈는, 단식 시위의 정당성을 두고 벌어진 모란 신부(리안 커닝엄)와의 긴 대화 끝에 IRA 수감자들의 정치범 인정을 요구하며 목숨을 건 단식 시위에 들어간다. 무려 66일 동안 단식한 샌즈와 9명의 IRA 수감자들은 서서히 굶어 죽어간다. 그러나 샌즈가 죽은 후 영화는 자막을 통해,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IRA 수감자들에게 정치적 지위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이들의 요구 대부분을 수용했음을 관객들에게 알리면서 끝난다.

 <헝거>는 폭력적 무장투쟁에 가담한 IRA를 순교자로 미화한다거나, 복잡한 북아일랜드의 분쟁을 단순화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에 가해지는 정치적 폭력에 대한 맥퀸의 적나라한 묘사와 영상미, 그리고 굶어 죽어가는 샌즈를 연기하기 위해 무려 16kg를 감량하고, 17분에 걸쳐 원테이크로 진행된 모란 신부와의 대화 장면 촬영을 단 다섯 테이크 만에 끝낸 패스벤더의 연기력은 거의 모든 평론가와 관객들의 인정을 받았다. <헝거> 는 2008년 칸 영화제 황금카메라상과 BAFTA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으며, 패스벤더와 맥퀸 모두에게 영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패스벤더와 맥퀸은 2011년 <셰임(Shame)>에서 두 번째로 협업했다. 이 영화에서 패스벤더가 연기한 브랜던은 뉴욕의 IT기업에서 근무하는 유능하고 전도유망한 여피지만, 사적으로는 성중독에 빠져 매일 음란물을 탐닉하고, 매춘부들과 성관계를 가지는 욕망에 찌든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매일같이 섹스에 빠져 살면서도 그는 막상 마음에 드는 회사 동료인 매리앤(니콜 비하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선뜻 열고 다가가지 못하고, 심지어 매리앤과 성관계를 가질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원만하게 진행시키지 못하는 괴로움을 겪는다. 이는 브랜던의 삶이 철저하게 피상적이고, 타인과의 진지한 관계나 소통은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여준다.

 욕망에 빠져 있던 브랜던의 삶은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여동생 시시(캐리 멀리건)가 그의 삶에 다시 나타나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타인과의 피상적이고 일회적인 관계만을 추구하는 브랜던과는 달리, 불같은 성격의 시시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계속 사랑을 추구한다. 브랜던은 오랜만에 갑자기 등장한 시시의 존재에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끼고, 시시는 욕망에 빠져 사는 브랜던의 삶을 허위라고 비난하며 브랜던에게 가까이 접근한다. 여기에서 관객은 브랜던과 시시 사이의 어떤 근친상간적인 관계가 있지 않은지 의심하며, 이것이 브랜던에게는 불편함이자 (이 영화의 제목인) 수치의 근원일지 모른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시시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브랜던은 시시에게 자신의 집에서 나가라고 명령하고, 시시는 그에게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다만 좋지 않은 곳에서 왔을 뿐”이라고 울먹인 뒤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결국 욕망과 수치심의 무게에 짓눌린 브랜던은 자살 시도에 실패한 시시가 입원한 병원 바깥에서 비를 맞으며 통곡하고 쓰러지고, 자기의 삶의 공허함과 소통의 불가능성에 좌절한다.

 정치적인 전작 <헝거>와는 달리 개인의 심리에 집중한 <셰임>은 평단으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대체로 평론가들은 <셰임>의 미적 연출이나 음악(특히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은 칭찬했지만, 영화의 주제 의식이 모호하다는 평가 또한 내렸다. 그러나 섹스로 삶의 공허함을 어떻게든 채우려는 브랜던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을 연기한 패스벤더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2012년 아카데미상에서 패스벤더가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지 않자 많은 관객들은 의아해했고, 맥퀸은 패스벤더의 연기력을 극찬하며 그가 남우주연상 후보에서 빠진 것은 “미국인들의 섹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가장 최근 협업은 2013년 영화 <노예 12년(12 Years a Slave)>이었다. 이 영화는 1841년 뉴욕주 새러토가에서 자유인으로 살았지만, 인신매매를 당해 루이지애나주에서 12년간 노예로 살다가 간신히 구출된 솔로몬 노섭(Solomon Northup)의 자서전을 기초로 제작된 영화로서, 19세기 미국 노예제도의 끔찍한 실상을 가장 잘 반영한 영화라고 평가받았다. 특히 <헝거>가 아일랜드 출신의 패스벤더에게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면, <노예 12년>은 카리브해 출신의 흑인 이민자 부모에게 태어나 소년 시절 차별을 겪으며 자란 맥퀸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패스벤더는 주인공인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의 악랄한 두 번째 주인인 에드윈 엡스를 연기했다. 에드윈 엡스는 패스벤더의 과거 두 배역과는 달리 철저한 악역으로 목화 생산량이 불만족스러운 노예들은 마구잡이로 채찍질할 뿐만 아니라, 노예 소유 및 노예들에 대한 학대를 기독교적 신념으로 정당화한다. 자신이 소유하는 노예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하면서도, 엡스는 노예 팻시(루피타 뇽오)를 강간하고 팻시에 대한 무자비한 소유욕을 보인다. 패스벤더는 성경 구절에 근거해서 노예제를 정당화하면서도 막상 본인은 짐승에 가까운 주정뱅이의 삶을 사는 엡스의 모순된 삶을 훌륭하게 연기했는데, 특히 엡스가 술에 잔뜩 취해 솔로몬과 팻시가 정분이 났다고 의심하며 솔로몬을 칼로 위협하고, 솔로몬을 쫓다가 돼지우리에 걸려 추하게 넘어지는 장면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그의 연기력이 가장 빛나는 부분일 것이다.

 <노예 12년>에서 맥퀸은 노예제가 추상적인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인간을 파괴한 악이었음을 고발한다. 노예선에서 하선한 후 상품처럼 전시되는 노예들, 자유인임을 주장하는 솔로몬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채찍질, 탈주하다가 잡혀 나무에 목이 매달리는 노예들, 엡스에게는 강간당하고 엡스의 부인에게는 멸시당하는 지옥 같은 삶을 살며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울부짖는 팻시,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밭일을 하다가 쓰러져 죽어가는 노예들 등 인간의 육체에 새겨지는 폭력과 고통을 통해 관객은 노예제라는 악의 추악한 실상과 마주하게 된다. <노예 12년>은 맥퀸의 최대 성공작이자 대표작이 되었으며, 2014년 아카데미상 작품상, 각색상, 여우조연상(팻시를 연기한 루피타 뇽오가 수상했다) 및 같은 해 BAFTA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솔로몬 노섭을 연기한 치웨텔 에지오포가 수상했다)을 수상했다.

 <노예 12년> 이후로 패스벤더와 맥퀸 간의 협업은 뜸해졌다. 패스벤더는 <엑스맨> 시리즈의 마그네토, 알렉스 갈랜드 감독의 <스티브 잡스>에서 스티브 잡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 및 후속작 <에일리언:커버넌트>에서 안드로이드 로봇 데이비드를 연기하면서 성공적인 연기 인생을 사는 듯 했으나, 2018년 2월에 전 여자친구를 폭행하였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2019년의 <엑스맨:다크 피닉스(X-Men:Dark Pheonix)>를 끝으로 연기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한다. 맥퀸은 2018년 범죄 스릴러 영화 <위도우즈(Widows)> 및 2020년 BBC One 채널에서 공개한 카리브해 출신 영국 이민자들의 삶을 그린 <스몰 엑스(Small Axe)>를 감독하는 등 꾸준히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보이고 있다. 패스벤더의 사생활에서의 잘못에 대한 비난 가능성과는 별개로, 이제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두 사람이 다시금 손을 맞잡고 영화를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윤태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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