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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독서기

“개를 제외하고 책은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다. 개에 푹 빠지면 독서를 할 수 없다(그루초 마르크스).”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육체와 같다(키케로).”

 

 가을이 깊어간다. 때때로 아무런 소음이나 자극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 들리는 듯한 고적한 밤에 책을 펼쳐 보자. 그런 그윽한 순간에 비로소 나는 인터넷이나 휴대폰의 질긴 포박에서 풀려나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으나, 체계적인 독서지도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인연 닿는 대로 책을 읽어왔다. 그런 세월이 긴 강물처럼 흘렀다. 오늘은 필자의 파란만장한 독서편력을 늘어놓아 볼까 한다.


책 읽기 첫걸음마

 어려서 처음 만난 책은 천자문(千字文)이었다. 동네 서당에 동무들과 함께 가서 무릎을 꿇고 종아리도 맞아가며 개구리 울어대듯 천자를 외웠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떼창이나 랩 비슷한 것이다. 그러던 시절 시골의 우리 집에서 자취를 하던 고교생이 졸업하고 서울로 떠나면서 초등학교 1학년이던 필자에게 선물로 책을 주었다. 손때 묻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한 권. 나중에 커서 읽어보라면서 머리를 쓸어주던 그 형님의 말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 후 ‘새소년’, ‘어깨동무’ 같은 잡지 읽기로 독서가 시작되었다.


질풍노도(疾風怒濤)의 난독(亂讀)시대

 “젊은이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1970년대는 책 외에 별다른 재밋거리가 없었다. 필자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취직을 위해 상고에 입학한 탓에 늘 마음속에 갈증이 있었다. 인문계 명문고에 다니는 학생들처럼 교양을 습득하지 못하고 산다는 열등감과 위기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일단 세계 명작을 몽땅 독파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스로마 신화, 일리어드와 오딧세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스탕달의 적과 흑,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뮈의 이방인, 카프카의 성 등등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운 수백 권의 서양소설들을 탐독했다. 그러다가 역사와 철학으로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감동을 받았지만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허다했다. 특히 그 무렵에 만났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은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몇 페이지 읽다가 던져버리고 말았다. 반면에 삼국지, 열국지, 초한지, 십팔사략 같은 역사책들은 밤을 새워 읽어도 지루한 줄 몰랐다. 난독의 효과가 있었는지 최전방 비무장지대에서 졸병으로 박박 기는 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선데이서울’이라는 잡지의 펜팔란에 고참병 이름으로 애절한 교제 호소문을 보냈다가 덜컥 당첨이 되었다. 그 기사를 본 경향 각지 뭇 소녀들로부터 수백 통의 편지가 쇄도하는 바람에 필자는 일약 부대의 유명 인사가 되어 외로움에 사무친 장교들과 고참병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고달픈 대필작가 생활을 했다.


골라 읽기의 깨달음

 30대 이후에는 직업적으로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지적 배고픔은 여전했다. 그 시기에 만났던 박종홍 교수의 ‘철학개설’은 무려 다섯 번을 정독했다. 철학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김홍섭 판사의 ‘무상을 넘어서’는 가슴저릿한 감동을 주었고 필자가 법관이 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박경리의 토지, 박완서의 소설들과 김수영, 김춘수, 황동규, 기형도의 시집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소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 스티븐 호킹의 과학 저작들 등은 일상을 떠난 무한한 감흥과 상상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소중한 통로였다. 서울에서 힘겨운 판사생활을 하다가 강원도 오지의 작은 법원으로 전근 갔을 때는 저녁마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책을 읽었다. 아이들은 동화책을, 아내는 다양한 소설책을, 필자는 주로 역사 서적을 보면서 떠들썩한 독후감 발표대회를 했다. 그때의 추억은 지금도 보석처럼 빛난다.


무인도에 가져갈 책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책들과 정보들이 무시무시하게 쌓여있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짝퉁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독서의 순수한 희열과 새로운 앎에 대한 동계(動悸, 가슴 두근거림), 진정한 통찰력 같은 것들을 주는 것은 시간의 시간을 이겨낸 고전(古典)들이다.

 만약, 우리가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살게 된다면,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는 전화번호부 한 권을 들고 가겠다고 했다. 거기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보며 수많은 이야기를 쓸 수 있겠다는 취지다. 필자는 인문학 서적을 택하겠다. 우선 성서와 반야심경, 도스토옙스키 전집 정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거기에 어린 시절에 선물 받은 릴케의 시집 한 권을 덧붙인다면 족할 것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추사가 제주로 귀양 가 있을 때,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은 고난에 처한 스승을 위로하기 위해 멀리 북경까지 가서 귀한 책들을 구해 제주해협의 거센 풍랑을 뚫고 스승에게 선물하였다. 이에 감격한 추사는 제자의 굳센 의리와 고귀한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이 공전절후(空前絶後)의 걸작에는 제자 사랑, 책 사랑이 오롯이 담겨있다. 깊어가는 이 가을에 등불을 밝히고 추사의 열정과 사랑을 회고하며 오직 나만의 인생책을 읽어봄도 좋지 않으랴.

황적화 변호사
● 법무법인 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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