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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판사의 재판 의지

 “어려운 사안이기 때문에 ‘증거를 채택하면 안 된다’ 식의 의견을 내지 말아 주세요.”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가진 서울민사지법한 재판장이 한 말입니다. 적극적인 증거 채택 요구는 최대한 많은 증거와 자료를 살펴보겠다는 것이며 곧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그 재판장은 이어서 “감정이 필요하다든지, 검증이 필요하다든지 등의 방향으로 의견을 내는 것이 재판을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기억에 남는 법정 풍경이었습니다. 판사의 재판 의지 때문입니다.

 변호사는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고 관련 법리를 적극적으로 검토한 뒤 승소 가능성을 높이려는 의지가 필요할 것입니다. 기자에게는 취재 의지가, 검사에게는 수사 의지가 필요합니다. 다만, 이들은 판사와 조금 다릅니다. 대중의 선택이나 성과를 신경 쓰는 변호사나 기자, 검사와 달리 판사는 자발적으로 내적 동기를 발현시켜야 합니다. ‘안 시켜도 알아서 충실히 재판하는 상태’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과중한 업무량은 이들의 사기를 꺾기도 합니다. 전국 법원을 합쳐 판사는 약 3,000명이고, 지난해 법원에 접수된 소송 사건은 약 668만 건에 달합니다. 소송과 재판은 많은데, 사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고도화되고 범죄 수법은 진화하고 있습니다. ‘재판 의지’를 판사 개인에게만 맡기기에는 한계가 뚜렷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판사 수를 늘리자는 1차원적인 해답은 섣불리 제시하기 어렵습니다. 판결 하나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지만, 법원의 구조적 문제는 쉽사리 나아질 거라고 보이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그들의 재판 의지를 독려할 수 있습니다. 사법정책이나 판례연구, 각종 토론회 등에 참여해 재판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건설적인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대법관 출신 한 법조인은 인터뷰 중 잠깐 쉬어가는 시간에 소위 ‘웃픈(웃고는 있지만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에 판례연구회 같은 연구모임이 참 많았는데, 요즘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법원 안에 사는 판사들끼리 하면 재미도 없고 또 판사는 실무를 잘 모르니까 변호사와 같은 바깥 사람들이 많이 참여를 해줘야 하는데, 잘 안 오더라고.”

 대표적으로 서울회생법원 부장판사가 협회장으로 있는 블록체인법학회가 있습니다. 판사와 변호사는 물론, 기자와 기업 사람들도 학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학회는 세미나, 토론회, 심포지엄 등을 수시로 열며 이해가 어려운 블록체인 관련 연구를 심화시켜나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많이 참여하지 못했지만, 세미나 등을 마치면 네트워킹 행사도 갖고 있습니다. 학회에서는 코인 등 가상자산 민사집행 신청이 갈수록 늘고 있지만 관련해 아직 가상자산의 성질에 대해서는 명확한 법이나 규정이 없다는 부분을 지적하며 관련 논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또 루나· 테라 폭락 사건의 발생과 동시에 루나· 테라 알고리즘과 사기 적용 가능 여부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만약 이 모임에 있던 판사가 블록체인 관련 재판을 맞닥뜨린다면 재판에 욕심을 갖는 것은 물론, 공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외에도 각종 기술이나 신종 범죄, 사법정책 및 재판과 관련한 법조인들의 활발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 말처럼 논의가 잦아질수록 법조인들의 사건 이해도는 높아질 수 있고 이는 빠른 사건 처리 속도로 직결될 것입니다. 다만, 판사와의 네트워킹으로 재판과 관련한 수상한 이야기가 오가면 절대 안 되겠습니다. 변호사님, 좋은 재판을 위해 판사의 재판 의지를 고취시켜주세요.

장한지 아주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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