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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을 해석할 결심

해석할 결심

 ‘총총한 별빛 아래 가야 할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행복의 시대’는 마감한 듯하다. 시대정신은 빈곤하고, 상대적이고 다원화된 욕구는 태양처럼 끓고 있다. <헤어질 결심>(이하 ‘<결심>’)의 세계 역시 상대적이고 모호하다. <결심>을 관통하는 대표 이미지는 안개이고, 안개 속 상징·은유·알레고리·패러디의 입자들은 분분(紛紛)하다. 어찌 ‘안개’를 쪼갤(分析)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건의 모호성으로 뛰어드는 것이야말로 변호사의 업(業)이다. 복잡다단한 사건들은 ‘김춘수의 꽃’처럼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 ‘상대적’ 의미 너머 ‘결정적’ 의미를 찾아내야 제대로 된 꽃을 피워낼 수 있다. 이를 위해 늘, 절실하게 해석하고자 한다. 고객, 상대방, 분쟁해결기관으로부터의 도전과 변증(辨證)의 과정을 견뎌낸 해석만이 최종의 법적 ‘의미’로 인정받는다. 이 압박에서 벗어나, 지인들이 추천한 2시간 분량 영화를 보며, 안개와 그 너머를 상상해 본다면 얼마나 가볍고 유쾌한 일이 될 것인가? <헤어질 결심>을 해석할 결심을 했다.


기호학(記號學)과 법학

 <결심>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 다소간 기호학(記號學) 지식이 필요하다. <결심>은 무수한 기호로 엮여 있고, 다른 텍스트(기호 복합체)들과 상호작용하며, 영화 자체를 한 덩어리의 단일 기호로 인식할 수 있다. 기호학은 기호들에 관한 지식체계이자, 기호의 ‘의미작용’과 해석에 관한 연구방법론이다. 땅과 하늘 사이 기호로 가득하고, 우리의 문화와 삶이 기호 자체이거나 기호를 매개로 구성된다고 보면, 기호의 해명 없이 우리의 삶도 해명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기호(記號)를 통해 의사소통하고 세계를 인식한다. 기호 유형에는 상징(symbol), 도상(icon), 지표(index) 등이 있고, 대표적 상징기호가 바로 언어이다. 법률언어의 체계로, 사실을 분석하고 법률을 해석하여 법적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는 법학방법론은 기호학을 통해 풍성해질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어느 법률문서(text, 기호의 복합체)에 적힌 상징기호들과 씨름하며, 연혁, 상황(context), 당사자의 의욕(욕망)을 길어내고, 하나의 ‘기호’로서의 계약서 일체에 당사자들이 진정 주입하고자 했던 의미(記意)를 찾아 나선다. 따라서 변호사는 어떤 면에서 기호학자이다. 나아가, 사건 속 여러 국면 온갖 용태(容態)와 텍스트를 마주하며, 그 의미에 대해 끝내 침묵하는 저자(著者)들의 부재(不在)를 실감하며, 독자(讀者)에서 저자의 자리를 기웃거리게도 된다.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이라는 해체주의의 표어가 변호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이유이다.


이성과 정념(情念)

 <결심>은 가히 기호학의 교과서라 할 만할 정도로 분석대상이 넘쳐난다. 먼저, 근대 ‘계몽주의 신화’로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 신화가 고대의 유물인 것만은 아니다. 근대의 신화도 차고 넘쳐 우리는 여전히 신화 없이 살 수 없음을 실감하게 한다. 기호에는 강력한 신화가 내장되어 있고 또한 풀려나오기 마련이다. 강력계 팀장(경감)인 ‘해준’은 근대 능력주의사회의 전형이다. 빛나는 실적을 보이며 고속승진한 ‘능력’의 표상이다. 그 이면에는 어둠이 있다. 불면증이 심해 수면부족 상태로 꾸역꾸역 강력사건들을 해결하고, 불면의 밤엔 미제사건 사진들과 마주한다. 이는 그의 자부심을 이루나, 이 집요함의 기원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역설적으로 그의 삶은 맹(盲)목적이다.

 근대 ‘이성의 언어’로 축조된 과학의 출발점은 ‘관찰’이다. 집요하게 관찰·규정하는 ‘해준’의 태도는 낯설지 않다. 바로 과학자의 태도이다. 동시에 그는 ‘관료’이다. 근대정치는 폭력을 ‘국가이성’에 독점시키고, 사적 폭력은 용납하지 않는다. ‘해준’은 ‘국가이성’ 아래 폭력의 대행자이다. 이러한 복수의 공적 대행은 말 그대로 공정무사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성의 윤리성, 즉 이성의 능력에 달린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의 유무를 따지는 대신 우리는 ‘국가이성’, ‘관료제 신화’에 깊이 침잠했다. ‘능력’의 표상이자 ‘관료’인 ‘해준’이 불면의 고통을 받고 있고, 그의 삶에는 ‘얼이 송두리째 빠져 있다’라는 점은 대단히 징후적이다.

 수사관 ‘해준’은 형사사건의 피의자로서 ‘서래’를 만난다. 이 권력관계(조사주체 - 대상)가 어느 순간 <나와 너>의 근원어 관계로 변모한다. 이성과 거리가 먼 정념(情念)의 작용에 따른 것이다. 이성이 물러서고, 정념이 흥기한 시점 새로운 관계, 인식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편, ‘해준’의 사심(私心)과 해이(解弛)는 공정무사의 ‘근대 이성’과 ‘관료제’에 대한 하나의 조소 (즉, 신화의 파괴)로 읽힐 수도 있다.
 

이중의 관계

 <결심>의 알파와 오메가는 ‘관계’이다. ‘관계’의 유동성과 모호성, 어긋남과 추락이 시종일관 극사실적(hyper-realistic)으로 묘사되어 있다. ‘해준과 서래 관계’를 하나의 ‘상징체’로 보았을 때, 이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이중적 관계’라는 기의(記意)를 읽어낼 수 있다.

 영화 속 대조되는 두 ‘관계’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마틴 부버의 『나와 너』(표재명 옮김)를 참조하여야 한다. 요약하면, “세계는 사람이 취하는 이중적 태도에 따라 사람에게 이중적이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Grundworte)의 이중성에 따라 이중적이다.” ‘근원어’란 바로 ‘나 - 너’ 및‘나 - 그것(Es)’의 짝말이다. ‘근원어’가 이중적이므로, 내가 어떤 ‘근원어’를 말하고 있는지에 따라 나도 이중적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은 <결심> 속 여러 관계와 국면에서 스스로 재현된다. 어느 순간 <결심> 속 낯설고 이질적 두 존재, ‘해준’과 ‘서래’는 ‘나 - 너’의 근원어로 대화하기 시작한다. 이는 온 존재를 기울인 행위이며, 모든 참된 삶은 이러한 만남에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2019년 작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속 부부 ‘에드워드 - 그레이스’ 사이는 ‘해준 - 아내’ 사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즉, ‘나 - 그것’의 관계). 따라서 두 영화 모두 다른 형태의 근원어와 등장인물의 이중성이 제시될 것임은 필연이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돌아본다.

惡女 또는 聖女, ‘몫이 없는 자’?

 ‘서래’라는 인물 자체가 하나의 기호(記號)이다. 관객에게도, ‘해준’에게도 그렇다. 사건도 기호이고, 사건 속 인물도 기호가 될 수 있다. 미지의 인물과 연루된 형사사건을 다루는 수사관은 그 미지의 기호(인물)를 잘 읽어내야만 한다. 꽤 유능한 수사관인 ‘해준’은 ‘서래’라는 기호를 잘 해석한 것일까? 그 해석의 어긋남에 <결심>의 묘미가 있고, 이는 ‘관계’의 어긋남과 맞닿아 있다.

 ‘서래’의 정체성은 모호하고 아득하다. 치밀한 계략과 ‘꼿꼿함’, ‘서래’에 붙어 다니는 사망사건들, 불면의 ‘해준’을 잠재우는 신통력과 함께 ‘서래’의 짙은 그늘과 애수는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악녀’로부터, ‘서래’라는 ‘그녀’의 이름이 환기시키는, 불교의 ‘여래(如來)’에 이르기까지 상상은 널을 뛴다. 즉, ‘서래’라는 인물 자체가 이 영화의 거대한 기호이자 정조(모호성)이다. 차분히 들여다보면, ‘서래’의 진실은 중국어를 쓰는 여성 이주노동자로 살인혐의에 간병 노동해야 하고 숨통을 틀어쥔 ‘남편’들로부터 학대당하는 이중삼중의 배제된 자라는 데에 있다. ‘서래’ 역시 불면에 시달린다. ‘서래’의 실상은 지배질서에서 배제된 자, ‘몫 없는 자’이다. ‘서래’의 처지는 『설국(雪國)』과 『무진기행』 속 ‘그녀’들의 처지를 환기시킨다.


거짓말과 윤리,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실종

 역설적으로, 거짓말할 수 있으므로 ‘관계’도 가능하다. 거짓말은 인간 문명에 결정적 요소이고, <결심>에서도 결정적이다. 우리의 거짓말은 뇌의 고도화된 능력이다. 속일 수 있으므로 윤리도 가능하다. 선악(善惡)은 연결되어 있고 상대적이다.

 거짓말한 당사자는 죄책감, 발각의 두려움, 수치심의 감정 상태에 놓인다. 감정이 클수록 숨기기 어렵고, 신체 반응 등으로 발각될 수 있다. 왜 수사관인 ‘해준’은 ‘서래’의 거짓말을 간과했는가? ‘서래’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이 없었을 것이므로 살인의 죄책감은 작다.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발각의 두려움이 작으며, ‘해준’의 호의를 알아채고 ‘해준’도 그녀가 무고하길 바란다 여긴다. 따라서 ‘해준’을 속인다는 죄책감도 생기지 않고, 감정의 파고는 낮으며, 거짓말은 성공한다.

 상황 변화가 일어난다. ‘해준’은 거짓말을 알아챘고, ‘붕괴’될 지경의 혼란을 겪고 있다 말한다. 이로써 수치심과 죄책감이 생성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는 반문은 그 표현이며, ‘서래’는 ‘실종’된다. ‘몫 없는 자’가 느꼈던 반짝이는 순간이 저물면, 환멸과 고독이 온다. ‘서래’의 실존 속 삶의 결단들이 ‘실존주의’의 그것처럼 당당해 보이면서도 애처롭기만 한 이유다. ‘서래’는 그녀의 세계를 붕괴시키고, 대신 ‘해준’의 세계를 지킨다.


안개 속 세계, 기호(記號)들의 붕괴

 영화는 상보적 기호들의 짝말로 빽빽하다. 잠시 손꼽아도, ‘너/나, 客/主, 女/男, 惡/善, 海/山, 外/內, 下/上, 仁/法, 感/理, 진실/기만, 질투/복수, 罪/罰, 愛(에로스)/死(타나토스), 구원/폭력, 도망자/추적자, 꿈/현실, 타살/자살’ 등 퍼즐 조각들로 즐비하다. 일견 복잡한 듯하나 실제로는 영화 속 사건을 전형적으로 질서 지우고 있는 이 조각들을 일시에 털어내는 사태, 그 ‘붕괴’ 순간에 <결심>의 미학과 새로움이 있다. 따라서 이 분분한 조각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양동운 변호사
법무법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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