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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할 권리

 원래 소설가 살만 루슈디(Sir Salman Rushdie)에 대한 글을 쓸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의 소설 『악마의 시』를 30페이지 이상 넘기지 못했고, 그가 『악마의 시』 외에 다른 어떤 작품을 집필했는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루슈디가 지난 8월 12일 뉴욕주 쇼토콰(Chautauqua)에서 강연 중(공교롭게도 이 강연의 주제는 위험과 박해에 처한 작가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청년에게 십여 차례 칼에 찔려 중태에 빠져 있는 이상, 루슈디에 대해, 그리고 더 나아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왜 루슈디가 40대 이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었는지 돌이켜보자. 루슈디는 1988년 자신의 대표작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를 출간했는데, 이 소설은 마술적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인도 출신 이민자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상실을 환상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악마의 시』에는 이슬람교의 선지자 모하메드를 묘사하는 부분이 있는데, 일부 강경파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은 이 대목이 모하메드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분노했다. 루슈디는 수 차례의 인터뷰에서 소설의 주제의식은 이슬람교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루슈디는 이슬람교도였으나 무신론자가 되었다) 인도와 파키스탄 등에서는 책 출판이 금지되었고, 심지어 그의 서적은 그의 새 모국(母國) 영국의 모스크들에서도 화형식을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1989년 2월 14일(하필이면 발렌타인데이였다. 훗날 루슈디는 이날을 냉소적으로 ‘Unfunny Valentine’이라고 회고했다) 이란의 최고지도자인 호메이니는 루슈디가 이슬람교와 선지자와 코란을 모독하였으므로, 전 세계의 이슬람교들에게 작가 루슈디뿐만 아니라 『악마의 시』를 출판하는 출판자 및 편집자들까지 모두 살해할 것을 명령하는 파트와(칙령)를 내렸다. 이 칙령을 계기로 루슈디는 무려 9년간 영국 경찰의 엄중한 경호 속에서 은둔자로서 살아가야 했다. 심지어 루슈디가 자신의 책 내용에 대해 사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호메이니는 자신의 파트와를 철회하지 않았다. 호메이니의 파트와를 계기로 수많은 문인들의 피가 흘렀다. 1991년에는 그의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한 이가라시 히토시가 도쿄에서 괴한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고, 같은 해에는 『악마의 시』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에토레 카프리올로가 밀라노에서 칼에 찔렸으나 목숨을 건졌다. 1993년에는 터키 시바스(Sivas)에서 『악마의 시』를 번역하는 작업에 한창이던 작가 아지즈 네신을 노린 방화 범죄가 벌어져 그가 묵던 호텔의 투숙객 37명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루슈디뿐 아니라 수많은 서점과 작가들, 번역가들, 편집자들 및 출판사들을 상대로 한 무차별적 테러는 1998년 이란의 온건파 대통령인 모하메드 하타미가 공식적으로 호메이니의 파트와를 집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루슈디 본인도 더 이상 은둔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종결되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호메이니의 파트와는 해제되지 않았고(파트와는 그것을 내린 사람 본인만이 철회할 수 있는데, 호메이니는 1989년 6월 3일 파트와를 철회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즉, 루슈디에 대한 사형선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여전히 루슈디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루슈디에 대한 습격은 이 같은 맥락 아래서만 이해할 수 있다.

 강연장에 난입하여 루슈디를 칼로 찌른 레바논 출신 청년의 동기가 무엇인지, 아직 우리는 모른다. 다만, 용의자가 SNS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와 호메이니를 찬양했다는 점, 그리고 습격 이후 이란 외무부가 습격을 찬양하고 루슈디가 화를 자초했다고 논평한 점을 감안하면, 루슈디에 대한 습격은 호메이니의 1989년 파트와의 연장선상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호메이니의 파트와뿐 아니라 이 비유혈 낭자한 공격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부정이고, 이란 외무부가 루슈디에 대한 폭력을 찬양한 것은 이란 정부가 민주주의의 다원주의적 가치를 전혀 존중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다른 모든 자유의 내재적 한계와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 역시 무한할 수는 없으며 한계가 존재한다. 내 자유는 타인의 자유가 시작하는 곳에서 그친다. 그 한계는 타인의 명예일 수도 있고 (다만, 명예훼손이나 모욕을 형법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것은 이제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질서일 수도 있으며(형법 제90조는 내란선동을 처벌하고 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미국 대법원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이라는 언론의 자유 제한의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일부 국가의 경우에는 사회적 소수자의 보호일 수도 있다(예를 들어, 독일 형법 제130조는 소수인종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또한 많은 국가들에서는 미성년의 보호를 위해 미성년자에 대한 성 착취물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 표현이 그러한 한계 내에 있다면 표현의 자유를 폭력으로 억압하는 것은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이다. 우리는 다양한 의견의 평화로운 교환과 토론을 통하여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을 뿐이고, 어떤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그 의견을 주장한 사람을 폭력으로 겁박하는 것은 범죄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진보 가능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의견은 모두 동일하지 않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누군가의 의견에는 반대할 수 있고, 누군가의 의견은 저열하고 저급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견이 민주주의 자체를 배격하거나 표현의 자유의 내재적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러한 의견을 억압하는 대신 토론하여야 한다. 즉, 의견에는 의견으로 대항하여야 하며, 의견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타자와의 공존에 대한 거부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풍자 잡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가 모하메드를 자살폭탄 테러범처럼 묘사한 것은 도가 지나친 풍자이며 인종차별적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2015년 1월, 테러리스트들은 그 풍자만화를 이유로 샤를리 엡도의 사무실을 폭탄으로 부수고 만화가들과 언론인들에게 총을 난사함으로써 자신들과 프랑스, 더 나아가 표현의 자유가 근간인 민주공화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루슈디가 당시 샤를리 엡도에 대한 테러범들의 만행을 강하게 규탄했던 것은 단순히 그 자신도 테러의 위험에 시달렸기 때문만은 아니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격이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공격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더구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우리로 하여금 당면한 사회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토론을 억압함으로써 해결 및 개선 가능성을 차단한다. 특히 이 점과 관련하여 자유로운 언론이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야 센(Amartya Sen)의 관점은 경청할 만하다. 자유로운 언론이 보장된 민주사회는 문제점을 조기에 발견하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을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토론하며 정부가 구성원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사회보다 기근 혹은 대규모 재난을 겪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마지막으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보통 사회의 소수자들을 보호하기보다는 도리어 소수자들을 제약하고, 권력자들에 봉사할 위험이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우리는 역대 군사정권들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민주화 인사나 야권에 어떻게 악용했는지 잘 알고 있다. 호메이니의 파트와는 이라크와의 오랜 전쟁과 경제난으로 인해 지친 이란 국민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정치적 술책의 성격이 짙었다).

 루슈디는 2020년 7월 7일 “하퍼스 매거진(Harper’s Magazine)”에 분열된 미국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언인 “정의와 공개 토론에 관한 서한(A Letter on Justice and Open Debate)”에 다른 지식인 152인과 함께 공동으로 서명했다. 그 서한의 내용 중 말미를 인용하는 것이 이 글을 가장 적절하게 마무리하는 방법일 것 같다.

 “토론의 억압은, 그것이 억압적인 정부 혹은 비관용적인 사회에 의한 것이든, 거의 늘 권력이 없는 사람들을 해치고 모든 사람들을 민주적 참여로부터 제한한다. 나쁜 의견들을 물리치는 수단은 그 의견을 공개하고, 토론하고, 설득하는 것이지, 그것들을 억지로 침묵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의와 자유 사이의 거짓 선택을 거부한다. 양자는 서로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우리는 작가로서 실험할 수 있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으며, 심지어 실수도 할 여지가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중대한 직업적 후과(後果) 없이 타인의 의견과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만약 우리 자신이 우리 직업의 전제조건을 수호하지 않는다면, 대중 혹은 국가가 우리를 위하여 이를 수호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살만 루슈디의 쾌유를 빈다.

윤태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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