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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의 어려움

 의뢰인으로부터 전달받은 정보는 사건을 파악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데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인이 추린 정보 위에서 공격과 방어를 준비하면서 사건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듣기”는 의뢰인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 수단 중 하나입니다. 의뢰인의 말을 직접 들음으로써 “글”로는 드러나지 않는 뉘앙스 차이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즉각적으로 궁금한 점을 되물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듣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걸 일하면서 자주 느낍니다. 관련하여 특히 기억나는 사건을 이야기해 드리고자 합니다.

 매도인 원고를 대리하여 매수인 피고를 상대로 계속적 거래에 따른 주방용품 매매대금 지급을 구하는 본소를 제기한 데 대하여, 매수인 피고가 원고가 판매하는 주방용품이 피고 자신의 등록 디자인권을 침해하였음을 주장하는 반소가 병합된 사건이었습니다.

 문제는 주방용품 거래가 소량으로 다발적으로 이뤄지는 소액 거래의 특성상 발주서나 납품서와 같은 거래내용이 나타난 문서가 거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메신저로 주방용품 주문이 이뤄졌다가, 전화로 다시 주문 물품과 수량이 변경되기도 하였습니다. 입증은 나중에 고민할 일이고, 언제 거래가 이뤄졌고 공급한 물품과 수량은 무엇인지 등 기본적인 사실 파악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런데 의뢰인이 컴퓨터 사용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사실관계를 글로 적어서 보내 달라고 요청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의뢰인의 입을 통해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방법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사건을 파악하는 것은 힘겨웠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의뢰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달랐다는 점입니다. 프라이팬과 냄비밖에 몰랐던 저에게 주방용기 한 종류만 놓고 보더라도 정말 다양한 형태, 소재, 용도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통하게도 수십 가지의 주방용품 각각을 칭하는 용어가 있었는데, 용어의 직관적인 의미만으로는 지칭하는 주방용품을 쉽게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업계의 용어나 표현, 관행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나 서적을 뒤적여서 알 수 없기에 혼자서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용어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의뢰인의 언어가 이해가능한 말로 들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의뢰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제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의뢰인은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의뢰인이 판매한 주방용품과 상대방 등록 디자인은 사각형 용기 형태로 언뜻 보아도 똑같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물건을 가리키면서 의뢰인은 “보세요 다르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의뢰인은 주방용품만 십 수년간 판매하면서 상대방 등록 디자인의 공통되는 형상을 이전부터 많이 봐왔고, 미세한 차이점을 확대 사진 마냥 포착했지만 저는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의뢰인 말에는 저에게는 당연하지 않은(의뢰인에게는) 당연한 사실이 전제되거나 생략되어 있었으니 듣고는 있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건을 대하는 감정의 온도 차이입니다. 의뢰인은 당연히 물건을 받고도 돈을 주지 않는 괘씸한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컸습니다. 그래서 사건 이야기를 할 때면, 상대방이 얼마나 양심이 없는 사람인지 그 사람에 대한 주위 평판, 예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냥 넘어가줬다는 사정, 그리고 의뢰인은 이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상대방 외에는 소란 없이 지냈으며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는 사실 등을 언급하였습니다. 분노와 억울한 감정 표출을 주체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입장에서는 매매대금 지급 청구의 요건사실이 중요해서 의뢰인이 어서 제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해 주기를 바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한 마음이 커갑니다. 그러다 보면 의뢰인의 말을 중단시키고 저 스스로 듣기를 멈추는 상황에 이릅니다.

 이렇게 듣는 것이 어렵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의뢰인이 단답형으로 답변을 할 수 있도록 질의문을 작성하여 보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대화를 하더라도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답변만 요구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현실적인 제약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효율적이라는 장점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물어보는 내용 이외의 사실은 놓치기 쉬운 단점도 분명합니다. 의뢰인은 “변호사님이 안 물어보셨잖아요”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위 사건은 주방용품 매매대금 청구 본소는 일부만 인용되었고 반소는 전부 승소하였습니다. 듣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서, 의뢰인의 말을 너무 성급히 멈추게 하지는 않았을까, 의뢰인으로부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은 걸까, 최선의 결과일까 하는 고민이 남는 사건이었습니다.

손정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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