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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섭 변호사 인터뷰

Q.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간단한 소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회지의 한 꼭지에 소개가 된다고 하니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야 평범한 무명 변호사 생활을 한 지 벌써 15년이 되었고, 그전에는 25년 동안 검사 생활을 쭉 해왔고, 특별히 잘하는 건 없지만 그저 검찰 재직 중에 지식재산권이라는 하나의 전문 분야를 만나서 지금까지도 쭉 지식재산권 전문 법조인으로 생활하고 있는, 그 정도로 소개할 수 있겠죠.


Q. 변호사님께서는 1981년 사법연수원 제11기 수료 후 서울지검 남부지청 검사로 처음 임관하셨지요. 당시 검사의 길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사실 법과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특별히 법조인이 돼야겠다거나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사법시험 합격을 하고, 실무 수습으로 검찰에 먼저 갔는데 그때 느낀 검사들의 분위기가 좋았고 또 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보람이 있는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검찰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Q. 90년대 초반에 검찰의 정보통신 기본계획 수립에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검사 생활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 당시 김두희 검찰총장께서 역점을 두신 사업으로 대검찰청에 21세기 연구기획단이 구성되었는데, 제가 검찰 연구관으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공공기관들이 대개 IBM 주전산기에 더미터미널이 연결된 폐쇄적인 망을 쓰고 있었어요. 이제 폐쇄적인 망에서 벗어나서, 인터넷과 연결을 시켜서 검찰의 정보통신 발전을 위한 이삼십 년짜리 비전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포부를 가지고 기본계획을 만들었었지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워낙 기술 수준이 6개월, 1년 단위로 빨리 바뀌다 보니까 이삼십 년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던 것 같고, 그저 어떤 기본적인 마인드를 바꿔 놓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아요.


Q. 그러고 보니 첫 임관하신 해가 1981년이었으니까, PC가 보급되기도 전이었겠군요. 그때는 타자기를 주로 사용하던 때였나요?

 어휴, 그렇지도 않았어요. 제가 임관했을 때만 해도 볼펜으로 조서 작성하는 경우도 많았죠. 따로 타자기를 보급받은 직원들, 소위 타자수들이 있어서, 공소장, 불기소장 이런 결정문들은 타자수들이 타자를 쳐서 작성했었고요. 젊은 검사들이 타자기를 구입하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저도 임관하고 얼마 안 돼서 타자기를 구입했는데, 써보니까 그렇게 편하더라고요.

 그러다가 검사 생활 한 10년 지난 다음에 검사들이 개인적으로 PC를 구입하기 시작했고, 저도 개인 PC를 가져와서 업무를 보다 보니까, 컴퓨터를 잘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잘못 난 거예요(웃음). 초기에는 그랬어요. 그렇게 우리가 컴퓨터에 대해서 무지했지요. 그러다가 21세기 연구기획단에서 정보통신 기본계획을 세우면서 실태조사를 해 보니까 개인이 구입한 PC가 이미 전국 검찰에 300대 정도가 들어와 있었어요. 검사가 천 명 정도 되던 시절이었는데. 그래서 ‘아, 이건 다 사주는 것이 맞다’ 라고 생각해서 검사 1인당 하나씩 컴퓨터를 보급하자는 목표를 처음으로 세웠죠. 이후에 제가 전산관리담당관으로 발령을 받고 그 목표를 실천하느라, 예산 타내느라고 경제기획원에 많이 다니면서 고생을 했지요.


Q. 1990년대부터 지식재산권 분야 전문 검사로 이름을 날리셨지요.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히 생소한 분야였을 듯한데,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계기는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아요. 88서울올림픽 개최 전후해서 제가 법무부 검찰국 검찰2과에 근무할 때, 과천청사에서 근무를 했었으니까 같은 청사에 있는 상공부, 지금의 산업통상부 사무관 한 분이 저희 검찰2과에 자주 오셨어요.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한미 통상 마찰이 굉장히 심한데 미국이라든지 EU, 당시엔 EC였죠, 그리고 일본 등 통상 상대 국가들이 우리나라가 지식재산권 침해가 너무 심해서 신뢰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로 삼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검찰에서 철저히 단속을 좀 해주면 어떻겠느냐. 하는 부탁이었어요. 가만히 들어보니까 공감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일을 다른 일보다 좀 더 비중을 두고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고, 이후 서울지검, 지금은 서울중앙지검이죠. 서초동으로 청사 이전하고 제가 부임하면서 처음으로 지식재산권 전담 부서가 지방검찰청 단위로 신설이 됐죠. 거기에 정식으로 지재권 전담 검사라는 명칭으로 발령받은 건 제가 처음일 겁니다. 1호라고 할 수가 있지요.


Q. 수사하셨던 사건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들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서울지검으로 발령받았다가 제가 고등검찰관 승진을 해서 부산으로 내려가게 됐어요. 그런데 사람을 따라서 사건이 오는 건지, 거기로 지식재산권 사건이 따라오더라고요. 1991년쯤이었는데, 제가 부산에 가서 처리한 사건 중 하나가 아래아 한글 2.0 불법 복제 사건이었어요. 아래아 한글 2.0은 불법복제 방지를 위해서 하드웨어 방식의 잠금장치가 있어야만 프로그램 실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잠금장치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불법 복제품이 유통됐어요. 그 사건 때문에 몇 달간 정말 고생했죠. 한글과컴퓨터 직원들도 저희 사무실에 와서 같이 밤을 새우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 암호 전문가들 이런 사람들이 와서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결국 범인들을 구속시키고 처벌해서 그게 언론에도 크게 나고, 그 이후로 한글 2.0 소프트웨어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죠. 오늘날의 한글과컴퓨터라는 큰 기업이 된 데에 나름대로 일조를 한 거지요(웃음).

 또, 뭐랄까 이중적인 느낌을 받은 사건이 있는데, 서울지검 지재권 전담 검사를 하면서 대학가 해적판 서적 단속을 많이 했어요. 우리나라가 1986년에 세계저작권협약에 가입하고부터는 해적판 서적이 당연히 불법이 되었지요. 저작권법도 정비가 되었고, 형사처벌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사회적인 여론은 여전히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공부하는 건 애국이다’ 이런 의식들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 해외 원서만 전문으로 출판하는 유명한 출판사 사장님이 계셨는데, 그분을 제가 수사해서 이제는 금지된 범죄라는 소신을 갖고 구속시켰어요. 사실은 그분이 예전에는 해외 원서를 출판한 공로로 훈장까지 받으신 분이었거든요. 비록 저작권자 승낙 없이 무단 복제 출판을 한 행위였지만 그분의 출판 사업 자체가 국내에서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공헌도가 높은 상황이었단 말이죠. 그런데 법이 개정되고 그게 불법이 된 이후에도 계속 저작권 침해행위가 있었으니까... 그때 제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처벌할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사건들이 우리나라의 지식재산권 보호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도 대학가의 해적판 서적이 여전히 있기는 했지만, 예전에는 대놓고, 아무렇지 않게 저작권을 침해하던 것이 음성화되었다가 차츰 사라져갔지요. 그러면서 정식으로 라이센싱해서 책을 출판하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의 학자들이 외국 서적에만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저서를 출판하는 경우가 늘어난 거죠. 제가 한 일들이 그런 바람직한 변화의 아주 먼 간접적인 원인은 되는 것 같아요.


Q. 검찰에서 25년간 근무하신 이후에는 모교의 법과대학 교수로 강단에도 서셨지요.

 네. 전임 교수로 3년을 있었는데, 아주 보람 있고 행복했던 시기였죠. 아직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젊은 사람들을 지도하면서 직접 교류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 당시는 법학전문대학원이 아니고 학부였으니까 더욱 그랬죠. 그런데 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되면서 학교에 남을 것이냐 아니면 법조계로 되돌아올 것이냐 고민했고, 지식재산권에 관한 전문성을 놓치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커서 변호사로 개업했지요. 그런데 사실은... 개업한 이후로는 말하자면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봐야죠. 객관적으로는.


Q. 개업 변호사로서의 삶은 어떠셨는지 여쭈어보려던 참입니다만, 실패의 연속이라니요?

 개업 변호사로서의 고충이 많이 있었지요. 법무법인을 조그맣게라도 설립했으니 직원들의 생활을 책임지면서 또 의뢰인들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주고 하는 것 자체가 전적으로 내 책임인데,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오는 일종의... 좌절감일 수도 있고, 그런 것을 좀 겪었어요. 그렇지만 지금 보시다시피 이렇게 즐겁게 지내고 있으니까 그걸로 만족해야죠. 좀 힘은 들었어도, 저 같은 경우는 변호사로서의 양심이랄까, 저의 철학에 어긋나게 해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사건 하나하나를 처리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철학을 얼마나 지켜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Q. 철학이라고 하시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의 캐치프레이즈가 ‘진실과 정성’입니다. 제 이름이 진섭이니까 진실, 성이 정 씨니까 정성, 이렇게 맞춘 것도 있지만(웃음) 사실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해서 변호사의 의무로 처음 배웠던 진실 의무와 성실 의무에서 따온 것이거든요. 진실과 정성, 이것은 사실 지키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요. 진실에 관해서만 이야기해보자면, 우리가 많은 진실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요건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고, 요건 사실의 한도 내에서 육하원칙에 맞추어 보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요. 그런데 변호사가 진실 중의 일부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서면을 써도 사건이 잘못될 가능성이 크지요. 결국 진실 의무에 충실한 변호사가 실력도 있지 않나,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Q. 다시 태어나신다면, 그때도 법조인이 되실 건가요?

 다시 안 태어날 건데요(웃음)? 다시 태어날 이유가 없어요. 저는 지금의 변호사 생활이 인생 2.5모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삼모작까지 하는 것이 목표이고, 지나간 일에 대해서 어떤 후회나 불평불만을 갖기보다는 앞으로 할 수 있는 보람 있는 일들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그러면 질문을 조금 바꿔서, 초임 검사 정진섭을 만날 수 있다면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을까요?

 없어요. 워낙 그때 실수를 많이 하기는 했지만... 누가 옆에서 충고해 준다고 해도 듣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초임 검사 정진섭으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돌아가고 싶지도 않죠. 그렇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Q. 우문현답이십니다. 마지막으로 후배변호사들에게 꼭 해주고 싶으신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기성 법조인들 입장에서 보면 젊은 법조인들이 법학의 기초가 조금은 부실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요. 예컨대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의 근본적인 차이, 요건사실론과 죄형법정주의, 증거법의 대원칙과 전문법칙. 이런 것들에 조금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쓰시면 좋겠지요. 하지만 법학 교육 시스템이 바뀌면서 달라진 부분이 많을 뿐이지, 후배변호사님들이 쓰신 서면을 보면 저희 때보다 더 고생하시고 또 열심히 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니 전혀 걱정되지는 않습니다.

 정말 드리고 싶은 말씀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마시되, 되풀이하지도 마시라는 겁니다. 젊었을 때의 특권은 실수를 해도 좋다는 거지요. 다만, 실수가 있었다면 반드시 교훈을 얻으세요. 밖에서 얻어지는 교훈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교훈을 얻으셔야 합니다.

 

● 인터뷰/정리 : 이승훈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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