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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혜공주와 정종의 묘를 찾아서

 이번 회보에서는 어디를 찾아 가볼까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고양시 대자동 건자산 자락에 있는 경혜공주와 정종의 묘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대자동 야산 기슭에는 이외에도 성령대군, 온녕군, 근녕군, 옥산군, 이성군, 경안군, 임창군, 밀풍군 등 조선의 왕자들 묘가 흩어져 있어, 가히 왕자의 계곡이라 할만하다. 또한 이곳에는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인원왕후의 아버지),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 김홍집, 성령대군의 장인 성억의 묘도 있고, 고려의 최영 장군 묘도 있다.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망자의 안식처로 소문난 곳일까? 동네 이름인 대자동(大慈洞)도 큰 자비가 있는 동네라는 뜻이니, 그 이름과도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대자동’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있던 절 ‘대자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태종이 넷째아들 성령대군이 14살로 죽자 이곳에 묘를 쓰고 아들을 위해 대자사를 창건한 것이다. 태종이 큰 자비를 염원하면서 절을 지었던 것이니, 그후 왕자들도 그 자비에 깃들려고 이곳에 영혼의 안식처를 마련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왕자의 무덤들을 포함한 많은 무덤이 있기에, 오늘날 역사의 흔적을 쫓는 답사가들이 또한 이곳을 많이 찾는다. 내가 많은 무덤 중 특히 경혜공주와 정종의 묘를 찾은 것은 이들의 비극적인 삶이 안타까워서다. 경혜공주는 단종의 친누나이다. 단종의 친누나라는 점에서 벌써 비극의 냄새가 나지않는가? 경혜공주는 1436년(세종 18) 세자 이향(훗날의 문종)과 후궁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자 첩의 딸이니 태어날 때는 공주가 아니라 현주(정3품)였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세자빈으로 승격하자 군주로 승격하였고, 그 후 아버지가 왕이 되자 공주가 된 것이다. 어머니가 세자빈으로 승격하였다고 하니, 앞선 세자빈이 사망하였기에 뒤이어 세자빈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겠다. 그러나 앞선 세자빈 순빈 봉씨는 쫓겨난 것이다. 궁녀 소쌍과 사랑을 나누다가 들킨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세자빈이 궁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럼 레즈비언이었다는 얘기 아닌가?

 얘기가 곁길로 빠지지만 이에 대해 좀 더 얘기하고 가자. 문종은 학문은 좋아하였지만 여자는 별로 땡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재위 2년여 만에 39세의 나이로 죽은 것을 보면 체력도 받쳐주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아버지 세종이 문종에게 섭정을 맡겼기에, 왕위에 오르기 전에도 5년간 국사를 돌보느라고 심신이 피곤하여 순빈 봉씨의 침소를 찾지 않았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밤마다 외로움에 몸을 뒤틀던 순빈 봉씨는 소쌍과 가까워졌고, 그러다가 서로의 육체를 탐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 순빈 봉씨만 쫓겨난 것이 아니라, 첫째 부인 휘빈 김씨도 쫓겨났었다. 문종은 휘빈 김씨의 침소도 잘 찾지 않은 것이다. 이럴 때 순빈 봉씨는 다른 여자와 사랑함으로써 외로움을 해소했지만, 휘빈 김씨는 적극적으로 남편의 사랑을 찾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문제였다. 휘빈 김씨는 남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뱀이 교미할 때 흘린 체액을 사랑의 묘약으로 쓰는가 하면,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어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사랑을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실현하려다 들켜 쫓겨났다. 이렇게 정실부인 둘이 쫓겨나는 바람에 후궁 권씨는 세자빈이 되었지만, 1441년(세종 23) 단종을 낳고 안타깝게도 다음날 사망하였다. 이후 문종은 죽을 때까지 정실부인을 두지 않았다. 조선의 임금 중 왕비 없이 지내다 죽은 왕은 문종이 유일할 것이다.

 얘기가 너무 곁길로 빠졌다. 경혜공주는 15살인 1450년(세종 32)에 전 한성부윤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鄭悰)과 서둘러 결혼하였다. 당시 세종의 병세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미적미적하다가 자칫 세종이 승하하면 3년상 기간 동안은 결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두른 것이다. 3년상을 치루어도 아직 미성년자인데 뭘 그리 서두르냐고 하겠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노처녀가 되는 것이기에 결혼을 서두른 것이다. 그런데 공주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3년으로 끝난다. 세조가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공주의 동생 단종을 쫓아냈다. 쿠데타로 멀쩡한 왕을 쫓아낸 것이니, 세조는 위험인물들을 귀양보내는데, 이때 정종도 유배당한다. 그리고 1456년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전라도 광주로 유배된다. 그러다가 1461년 승려 성탄 등과 반역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정종은 거열형(車裂刑)으로 젊은 삶을 마감한다. 그런데 정종이 과연 그 당시 진짜 반역을 도모했을까? 민감한 세조가 뜬소문만 듣고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거열형이 뭔가? 세조는 단종을 죽이고 그 시신도 챙기지 못하게 했으며, 자기 동생들인 금성대군, 안평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의 태실을 파헤쳐 태와 빗돌을 모두 산 아래로 던져 버리기까지 한 옹졸한 인간이다.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였으니 자신도 그렇게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그런 히스테리로 나타난 것이리라.

 남편 정종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때에 아내 경혜공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남편이 통진으로 유배되었을 때 공주도 따라갔고,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을 때도 따라갔다. 이때까지도 경혜공주는 공주의 신분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정종이 사형 중에서도 제일 극악한 거열형을 당했으니, 아내인 경혜공주가 온전히 제 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여 경혜공주는 순천부의 관노비로 전락하여,- 노비까지 된 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 6살 난 아들 정미수의 손을 잡고 만삭의 몸으로 순천으로 떠난다. 하루아침에 노비가 되어 만삭의 몸을 이끌고 순천으로 향하는 공주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으리라. 아마 순천으로 향하는 공주를 길에서 만난 백성들도 안타까움에 같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아무리 왕조국가라지만 여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여론은 당연히 경혜공주에 동정적이었을 테니, 세조는 경혜공주를 복권시키고 서울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정희왕후는 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궁궐로 데리고 와 길렀고, 공주가 출산한 딸도 거둬들인다. 경혜공주는 왜 자식들을 자신이 기르지 않고 궁궐로 들여보냈을까? 비구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긴 공주가 이 더러운 속세에서 어떻게 홀로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하여 공주는 딸을 출산하자 머리 깎고 비구니로 출가하였다. 그러나 출가하였어도 가슴속에 타오르는 분노와 원한의 불을 완전히 끌 수는 없었던지, 공주는 39살의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차를 관산25통 마을회관 앞에 세워놓고 경혜공주 묘를 찾아 건자산으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정표에는 이웃한 성억, 김주신, 김홍집 묘에 대해서는 나오는데 경혜공주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더욱이 마을 앞길에 세운 역사묘지 안내도에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내가 보기에는 이 근처 역사묘지 중에는 경혜공주와 정종의 비극적인 삶이 그들의 묘로 사람들을 더욱 끌어들일 것 같은데, 이정표 하나 없다니? 인터넷 지도를 켜놓고 대충 짐작하며 길을 찾아가니 기슭에 비 하나가 외롭게 서있다. 정종의 신도비이다. 그리고 신도비를 지나 수북한 낙엽에 묻혀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을 헤치고 올라가니 드디어 경혜공주와 정종의 묘가 보인다. 그런데 공주의 묘는 중앙에 제대로 봉분이 만들어져 있음에 반하여, 정종의 묘는 그 옆에 딸린 묘인양 작게 만들어져있다. 시신이 없는 허묘이다. 거열형을 당하여 시신이 갈래갈래 찢어졌고, 더군다나 역적으로 형을 당한 것이니 제대로 시신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세운 듯한 정종의 허묘 앞 비석에는 ‘묘(墓)’가 아니라 ‘제단(祭壇)’이라고 쓰여있다. 잠시 무덤 앞에서 묵념을 한다. “공주여! 부마여! 이승에서는 그리 슬피 가셨지만, 그곳에서는 두 분이 두 손 꼭 잡고 행복의 시간을 보내시겠지요? 550년 뒤의 후손이 인사드립니다.” 묵념을 끝내고 숙연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오랜 세월에 버짐으로 얼룩진 공주 무덤 앞의 비가 내게는 눈물로 얼룩진 것으로 비친다. 이제 공주와 정종의 묘를 떠나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내려갈쏘냐. 나는 바로 위에 보이는 건자산 주능선을 향해 낙엽으로 미끄러운 발길을 조심조심 올린다.

양승국 변호사
● 법무법인(유)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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