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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시험능력주의’ 무림의 무협 판타지

학교, 욕망과 불안의 괴(怪)공간, 무림(武林)

 우리의 교육 현실은 기괴하다. 시험(‘입시’)이 교육의 숨통을 바짝 틀어쥔 형국이다. 교육의 목적과 과정은 ‘입시’에 종속되어 있다. 전장(戰場)으로 화한 학교는 승패와 우열(優劣), 좌절과 분노로 일렁이는 정념(情念)의 괴(怪)공간으로 깊이를 더해 가고 있다. 이 공간을 중심으로 학원물의 극적 사건 지평이 열린다. 무리 속 서열 다툼이 요란하고(<말죽거리 잔혹사>), 개체는 고립되어 질식하거나(<파수꾼>, 희생제물로 불태워지고(<지렁이>), 급기야 소외된 유령들이 슬피 배회하나(<여고괴담>), 가해와 속죄는 어긋난다(<시>).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이하 <수학자>)도 동일 지평의 사건을 다룬 학원물이자 일종의 성장극이나, 무협물의 관습을 적극 수용하고 있다. 학교 공간을 무림(武林)으로 노골화한 <화산고> 정도는 아닐지라도 무협의 요소가 물씬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로써 감추어진 부분(또는 허위의식)을 찾는 일이 보다 의미 있을지 모른다.
 

전장(戰場)으로서의 학교와 강호(江湖) 생성의 욕망

 학교는 세속의 욕망으로 들끓고 있다. 학교는 욕망 실현을 위한 병목(입시)이다. 병목의 압력과 열기는 진입로로 전도되어 학교 현장을 한없이 달뜨게 한다. 학교에서 문화자본이 재생산되고 사회자본과 경제자본 획득으로 직결된다. 기숙형 자사고인 <수학자> 속 학교는 상위 1%
가 모인 문제의 열점(熱點)이다. 이곳에서 살아남기(자본 얻기) 위해 높은 무공(성적)이 요구된다. 이곳은 ‘무림(武林)’의 공간으로 손쉽게 치환된다.

 불행히도 이곳에 이(利)의 추구는 득실대나, 의(義)는 찾아볼 수 없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지우’가 ‘무림제일문파’인 ‘자사파(玆蛇派)’의 ‘사제(師弟)’라는 사실은 어머니의 자랑이다. 반면 ‘지우’를 위한 실질적 지원이나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질적이고 불편한 존재인 ‘지우’를 제거해 버리려는 사악한 의도가 스멀거린다. ‘지우’는 비정규 장시간 ‘노동’을 전전하는 어머니에게 결단코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의 무공은 너무도 일천하고, 그의 직근 사부 ‘담탱(擔㯑)’은 ‘사배자’ ‘지우’를 경멸하고 축출하려 한다.

 마침 ‘자사파’의 무공경연대회(수학경시대회)를 앞두고 있다. 상위 1% 예비 고수들의 경연은 무림 전체의 판도에 영향을 미치고, 이곳에서 이기는 자가 사실상 무림 1대 고수로 등극한다. 허약한 무공(수학 성적)의 ‘지우’에게 경연대회는 ‘화중지병(畵中之餠)’일 뿐이다. 무공을 높여 ‘자사파’에 잔류하는 것만이 시급한 과제이다. 그러나 고립무원이고 기댈 곳이 없다.

 이 가운데 ‘의(義)의 공간’은 은밀히 열린다. 무협세계에는 조정, 민가와 저잣거리 등을 포함한 세속 사회와 대비되는 ‘강호(江湖)’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협객(俠客)이 생성되고 활동하는 곳이다. 사람의 발길 닿지 않는 은밀한 절경 아래 신비의 무공을 연마하며 협객은 생성된다. 어떻게 하든지 ‘지우’는 바닥 상태의 무공을 올려야만 한다. 이를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 ‘강호’의 공간이다. 교내 ‘과학실’이 ‘강호’로 자리매김한다. 강호가 허구의 공간인 만큼 이 공간 역시 허구의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은 ‘이상한 나라’이다.


의(義)의 자질과 은둔 사부(師父)의 등장

 강호는 협객의 터전이나 협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살수(殺手), 도적, 흉승(凶僧), 사파(邪派)의 고수, 여러 다른 협객들이 들락거리고, 때론 조정의 공격을 받으며, 어제의 협객이 오늘 타락하고 사부와 사형의 배신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높은 경지의 무공이 요구된다. 비교 불허의 절대 경지에 오를수록 안전하다.

 그런데 높은 경지의 무공이 함부로 전수되는 법은 없다. 그럴 만한 자질과 운이 요구된다. 자질의 핵심은 ‘의(義)’이다. 강호 규범의 근간 역시 ‘의’이고, ‘의’를 통해 ‘협’의 윤리성이 선다. ‘지우’는 이미 범상치 않은 ‘의리’를 보였다. ‘담탱’의 집요한 추궁에도 야식소주공(夜食燒酒功)을 시전한 ‘사제’들의 정체를 끝내 숨긴다. 설익은 의리일 망정 이런 우직함이야말로 협객의 자질이다. ‘의’를 지킬 수 없는 자는 협객으로 선택받을 수 없다.

 ‘의’를 지켜 ‘협’의 자질을 보인 ‘지우’는 누구로부터 어떻게 무공을 전수받을 것인가? ‘강호’ 어딘가 신공을 지닌 절대고수가 은둔해 있기 마련이다. 한때 ‘북림마교(北林魔敎)’에 몸담았다 절교하고 스스로 유폐된 채 ‘자사파’의 문지기로 위장한 ‘학성(學聖)’이 바로 그다. 세계난제 ‘리만가설’을 풀어낸 비교 불가 절대고수이다. ‘지우’의 처지와 자질을 알아본 ‘학성’은 ‘과학실’에서 은밀히 무공을 전수한다. ‘학성’이 제시한 문규(門規)는 ‘학성’과 ‘지우’의 관계에 ‘입시’를 개입시키지 말라는 것이고, 관계의 비밀을 지키라는 것이다. ‘협’의 자질을 지닌 ‘지우’, 부진정(不眞正) ‘사배자’인 사매(師妹) ‘보람’, 절대무공의 사부(師父) ‘ 학성’이 나타났고, ‘문규’까지 마련되었으므로, ‘자사파’ 안 또 하나의 비밀 ‘문파’가 결성된 셈이다.


무림(武林) 일대사건(一大事件)

 따지고 보면, ‘무림’의 공간, 주인공인 ‘협객’, 무공을 전수할 ‘스승’ 등은 모두 무림에서 벌어질 일대사건을 위해 예비된 요소일 뿐이다. 비밀공간 ‘과학실’에서 무공은 전수되고, 무공경연대회가 다가온다. 무협의 요소들은 무르익었고, 한바탕 대소동이 벌어져야 할 시점이다. 역시 무림 비급 도난이라는 대사건이 터졌고 무림은 발칵 뒤집힌다. ‘사파(邪派)’와 연계된 사건의 장본인 ‘담탱’은 ‘지우’에게 누명을 씌우고, ‘지우’의 출파를 종용한다. ‘지우’는 끝까지 ‘의(‘학성’과의 비밀준수약속)’를 지키기 위하여 오명을 뒤집어쓴 채 무림을 떠나고자 한다. 이때 홀연히 나타난 ‘학성’은 사실을 밝히고 ‘담탱’은 혼비백산 도주한다.

 무림의 사건은 무공(武功)을 통해 해결되어야 하는 법이다. ‘자사파’의 일대사건을 일거에 정리해 버린 ‘학성’의 증언이 ‘무공’ 자체는 아니다. ‘학성’을 익히 알고 있던 또다른 고수의 확인으로 ‘학성’의 증언이 힘을 얻었으므로, ‘학성’의 절대무공 덕으로 해결되었다 보아도 무방하다.  절대고수는 무공을 쓰지 않고도 무림을 제압한다. 이로 인해 ‘학성’의 정체가 드러나고, 제3의 공간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을(乙)들의 연대? 노동에 대한 혐오!

 <수학자>가 모종의 재미를 자아내고 감동까지 주었다면, ‘인민군’으로 표상된 낯선 존재, ‘잉여’같은 존재 ‘학성’이 고립무원의 약자 ‘지우’에게 손을 내밀어 억울함을 풀어주고 진정한 학문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욕망과 불안이 혼재된 남방의 한 켠에서, 북방의 이질적 존재 ‘학성’이 ‘의(義)와 지(知)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설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러한 서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을(乙)들의 통쾌한 아름다운 연대에 감동해야 할까?

 세계난제 해결 정도는 아니더라도 학문의 기쁨을 전수해줄 ‘학성’이 우리 곁에 있는가? 우리의 ‘입시’ 교육은 그러한 즐거움과 의미를 부정하는 반교육적 측면이 강하다. 입시교육을 매개로 한 사회·경제적 지위의 세습 현상은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입시 후단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학문의 전당’은 의(義)가 아닌 이(利)를 되뇌고 있는지 오래고, 스스로에게조차도 의미 없는 실적 쌓기용 논문들을 다량 산출해 내고 있다. ‘입시’ 공부에 질린 대다수는 더 이상 배우고 따져 묻지 않고, 전자단말기의 ‘sound bite’에 과몰입한다.

 우리의 현실에는 고립무원의 ‘지우’들이 차고 넘치나, 개체화된 자아는 ‘연대’를 원하지 않는다. 대부분 ‘포기’하고 때론 ‘초월’하고자 한다. 이로써 ‘흡성대법(吸星大法)’, ‘북명신공(北冥神功)’ 또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능력을 얻고자 하는 무협 판타지의 욕망이 넘쳐난다. <레인맨>에서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우리는 숨겨진 높은 재능에 열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찍이 그러한 판타지를 충족시켜온 텍스트가 바로 무협물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미 수십 년 전 자본주의의 진전으로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과 무협소설 소비현상의 상관관계를 논하며, 무협소설을 일종의 ‘환각제’로 규정한 바 있다.

 사회학자 김동춘은 ‘입시’를 매개로 앞면과 뒷면을 차지하는 ‘지배’와 ‘배제’의 체제를 분석한다(『시험능력주의』). 이 ‘지배’와 ‘배제’의 체제를 공고히 해주는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서열주의’를 내면화시키는 무의식의 주조 과정이자 ‘노동자 되지 않기 운동’의 일환이 된다. 이러한 ‘지배 욕망’과 ‘노동 배제’의 현실 속에 무협 판타지 현상이 나타난다. <수학자>의 ‘잉여’ 존재 ‘학성’은 <싸움의 기술> 속 기원을 알 수 없는 은둔고수 ‘오판수’를 환기시킨다. 소외된 학생들은 서열을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비급’을 간절히 희구하나, 끝내 충족될 수 없다.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소수를 위해, 이(利)의 논리로 작동하고, 필연적으로 대다수를 들러리로 남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핍을 판타지로 충족시키기 위하여 무협적 요소와 관습은 여전히 요구된다. ‘신공’과 ‘강호’를 더 이상 희구하지 않는 세계를 향했던 ‘계몽의 기획’이 끊임없이 실패하고야 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양동운 변호사
● 법무법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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