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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사건을 수임하면 기쁘다. 그러나 며칠 뒤 복잡다단한 사건임을 알았을 때는 기쁨이 싹 사라진다. 동일 · 유사 선례가 없을 때는 두렵기까지도 하다. 나 때문에 일이 그르치지 않을까. 혹여 발생할 후폭풍을 떠올리면 잠이 오지 않는다. 뒤척이다 간신히 잠들었다.

 아침이 왔다. 이번 주까지는 반드시 소장을 제출하기로 마음먹고 출근했다. 그러나 ‘1. 당사자 지위’ 라는 글자 이외에 더 이상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도무지 갈피를 못 잡아 바람을 쐬러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서초역을 지나 대법원을 지나 한국세무사회 쪽으로 걸었다. 서울고등학교 앞 사거리에서 방배역 쪽으로 다시 걸었다. 사무실을 나오면서부터 계속 사건을 생각했다. 문제는 무엇일까?, 문제는 무엇일까?, 나를 사건 속 사람에 대입시켰다. ‘나라면 어떠했을까?’, ‘나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라면 어떤 행동을 했을까?’, 어느새 ‘효령대군 능’ 앞에 다다랐다.

 뻥 떠진 천둥벼락같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뒤범벅되었던 머리에 햇빛이 비치면서 사건의 내막이 서서히 보였다. 그제서야 수임할 때처럼 웃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사건을 장악하고 열심히 소장을 썼다. 그날 전자소송으로 소장을 제출했다.

 이런 경험으로 사건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면 산책을 한다. 방배역, 서래마을, 가톨릭대학교병원을 뺑 돌아 다시 교대역으로 오는 길 등 나만의 산책 코스가 생겼다. 게다가 새로운 산책길을 개척하는 쏠쏠한 재미까지 있다. 걸으면서 소나기처럼 다가올 아이디어를 대비한다. 실제로도 뜻밖에 내리친 요란한 천둥번개처럼 우연히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판례나 논문을 찾아서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사건 해결의 단서는 우연히 찾아온다. 순간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근사한 상념, 그 상념은 실로 우연히 찾아오나 사실은 성심을 다한 깊은 사색의 결과이다.

 이제는 어려운 사건을 수임해도 두렵지 않다. 방배역으로 향하는 ‘효령대군 능’ 어디쯤, 성모병원을 지나는 보도블록 그 어디쯤, 그 사색의 길 어디쯤에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김상철 변호사
● 법무법인 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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