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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헤라클레이토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부처의 유언)

 

 인생은 변화무쌍하다. 주역(周易)은 변화를 논한다. 공자는 당대 가장 어려운 경전인 주역에 몰입하여 책을 꿴 가죽끈이 여러 차례 끊어질 정도로 탐독했다고 한다. 필자는 젊은 시절 주역 책을 몇 번 펼쳤다가 완독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어렵다는 주역의 핵심을 좀 쉽게 알 수 없을까? 어떤 학자는 그것을 간단히 ‘양중음 음중양(陽中陰 陰中陽)’이라고 설명한다(조용헌 박사). 이 말이 과연 무슨 뜻일까. 필자 나름대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양중음 陽中陰 - 성장 속에 쇠퇴의 씨앗이 숨어 있다

 새의 깃털을 모아 하늘을 날게 된 이카로스는 광활한 창공을 날아오르면서 비행의 성공에 도취되었다. 적정한 고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했지만, 그는 제한 고도를 무시한 채 급상승했고, 마침내 날개를 이어 붙인 밀랍이 태양열에 녹는 바람에 에게해(海)의 심연으로 아득히 추락했다. 주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항룡은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으로서 부귀영화가 절정에 이른 존재다.

 그래서 저절로 마음이 교만해지고 배는 태산처럼 불룩해진다. 그러다가 급기야 인심을 잃고 적들이 많아져 크게 몰락하고 만다. 후회할 일만 가득한 용이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 매우 잘나가고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옷깃을 여미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내가 걷는 꽃길이 순식간에 가시밭길로 변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수많은 재물과 높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폭삭 망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예는 너무나도 많다.  독자들도 주변에서 그런 인물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주역은 성장과 발전을 의미하는 양(陽)속에 이미 쇠퇴와 소멸을 뜻하는 음(陰)의 씨앗이 숨어 있다고 갈파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음양의 반전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 변화에 순응하고, 겸손한 마음과 분수를 잃지 않으며, 주위에 덕을 베풀고 나누는 삶이 어떨까. 성서의 잠언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기도가 있다. “나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잠언 30장).” 가난을 면하고 싶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부자가 되지 않게 해 달라는 요청은 대체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음중양 陰中陽 - 눈물 속에 기쁨이 싹튼다

 필자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형편상 서울 유학을 꿈꾸기 어려웠다. 이를 딱하게 여긴 삼촌이 필자의 손을 잡아끌고 먼 친척이 운영하던 서울 종로의 어떤 호텔에 학비 동냥을 하러 갔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방에서 회장님이 거지행색의 중늙은이와 까까머리를 세워두고 일갈했다. “애비 없는 놈이 진학은 무슨! 공장 일자리나 알아볼 테니 그리 알아라.” 그의 비정한
말 폭탄에 가슴 속 빙하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작정 상경하여 때로는 하루 한두 끼로 버티면서 악착같이 학교를 다녔고, 어린 시절의 불행들을 원망하거나 과장 또는 미화하지 않기로 했다. 많은 분들이 그런 적빈(赤貧)이나 소외의 고난을 겪었을 것이다. 지금도 주변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넘친다. 수많은 이들이 남몰래 눈물을 삼키며 산다. 그런 것이 바로 음(陰)이 지배하는 시간 속의 삶이다. 그래도 하나의 문이 닫히면 새로운 문이 열린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다. 성서에서 만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구절을 소개해 본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편 126장).” 변화의 기회는 여기에도 있다. 그런 반전을 이루려면 비록 지금 추운 음(陰)의 시절을 살고 있어도 봄날에 양(陽)의 씨앗이 움트도록 마음 밭을 잘 갈아야 한다. 주역의 가르침은 명쾌하다.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상無常을 넘어서 - 진리가 밝히는 길

 그런데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자기일신의 안녕을 위해 주역의 이치를 따라 화(禍)를 피하고 복(福)을 비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 뼈아픈 지적이다. 생성과 소멸의 사이클은 무한 반복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인생도 그렇다. 태어나고 죽고, 흥하고 망하는 일들이 거듭되는 것이 모두 덧없고 허무하다. 그래서 싯다르타도 예수도 공자도 안락한 삶을 버리고 고행의 길을 나선 것이 아닐까.

 우리 법조인 중에 이런 물음에 뚜렷한 길을 보여 준 분이 있을까? 사도법관(使徒法官) 김홍섭 선생을 먼저 떠올려 본다. 선생은 1965년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내다 지병으로 별세했다. 수많은 법조인과 국민들이 깊은 슬픔 속에 선생을 추모했다. ‘위대한 재판관’, ‘참된 인간’, ‘진실한 종교인’, ‘지극한 휴머니스트’ 등의 표현으로 추앙받는 선생은 평생 청빈과 사랑으로 일관했다. 스스로 타인을 재판할 자격이 있는지, 오판의 가능성은 없는지를 항상 번민했다. 자신이 담당 판사로서 극형을 선고한 사형수들을 찾아가 종교적 감화에 노력했고 마침내 그들을 대자(代子)로 삼아 가톨릭 세례를 받게 해 주기도 했다. 박봉을 털어 교도소의 많은 재소자들에게 음식과 책을 나눠주었다. 불의한 일에는 추상같았지만, 주변에는 항상 봄바람 같은 인정을 베풀었다. 선생이 별세했을 때, 영정 옆에는 이미 형 집행된 사형수들(그의 대자들)의 사진액자 10여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다. 선생의 유고집 제목은 『무상(無常)을 넘어서』다. 선생은 이 무상한 인생 속에서 어떤 영원한 것을 찾았을까. 그것은 참된 진리에 대한 사랑과 실천이 아니었을까.

 주역은 기복(祈福)을 위해 점을 치는 책으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세상 변화의 이치를 관조하고 초월적 영역까지 도 조망하는 명상(冥想)을 위한 책이라고 봄이 옳다. 필자는 역학(易學)에 대한 깊은 지식도 없이 그저 겉핥기식으로 횡설수설해 보았다. 독자들의 관대한 양해를 바란다.

 

황적화 변호사
● 법무법인 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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