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회원의 상념
이혼한 여성 변호사가 느끼는 불편함에 대하여

“부끄럽지만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동안 나는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격차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그런 영역이 얼마나 많을까? 어린이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여러 소수자들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둔감했는지 깨닫게 된다.” -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 에세이) 중에서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난 소수자나 약자를 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존중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로만 그런 거였다. 이혼한 사람은 숫자로 놓고 보면 소수자가 아닌데, 마치 소수자처럼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혼을 한 후 협의의 의미에서의 소수자가 되고 보니, 난 소수자에게 진정성을 다해 공감하고 있던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아무렇지도 않았던 표현들이 많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애 딸린 이혼녀”가 그중 하나인데, 문제는 이혼한 여성만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사는 아이를 마치 짐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이 표현을 옛날 드라마나 사적인 대화에서 듣게 되었을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남의 이야기로 여겼을 뿐인데, 내 이야기가 되고 보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난 소수자들에게 진정으로 공감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가 핏덩이처럼 어려 육아에 지쳐있었고 어떤 걸 해도 힘겨워 일상적으로 해내던 일조차 버겁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아마 난 우울감이 극에 달했거나 어쩌면 우울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남의 자식은 못 키우겠다. 내 새끼니까 키운다”는 말을 많이 하고 다녔는데, 단지 “육아는 힘들다. 특히 아이가 어린 경우 더 그러하다”는 식상하단 표현 이외에 달리 육아의 힘듦을 대체할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발언은 입양 가족 또는 재혼 가족에게는 폭력적인 발언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내가 생각보다 많이 저러고 다녔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고 지금도 무척이나 숨고 싶다. 저 문장에 반응한 사람이 없었는데, 내 주변에 입양 가족이나 재혼 가족이 없는 게 아니라 어쩌면 저런 말을 하는 내게 그저 웃으며 함구한 걸 수도 있다. 내가 이혼 후 양육권을 가진 걸 모르는 사람이 내 앞에서 “애 딸린 이혼녀”를 운운할 때 내가 그저 웃으며 함구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 아닌 부분에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지 못하고 내가 불편한 부분이 있어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이혼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의 발언, 이를테면 “○○ 씨가 최근에 부쩍 이혼한 걸 동네방네 말하고 다니더라? 재혼하나 봐. 축의금 또 받으려는 거지.”라거나(축의금을 내지 않으면 될 텐데요), “애들은 무슨 죄냐. 재혼해서 아빠 만들어줘야지”라거나(사별이 아니라서 아빠 있고 면접교섭도 잘하고 있을 수도 있을 텐데요) 등등 이 정도에 상처를 안 받는 건 아니지만 그럴 때면 나 역시 앞서 본 저 말을 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분들은 그저 경험하지 못해서 모를 뿐이고 악의는 없다는 걸 이제 잘 안다.

 김연수 소설가의 산문집에서 “더 아픈 사람 눈에는 덜 아픈 사람이 보인다”고 한 것처럼, 더 경험한 사람 눈에는 덜 경험한 사람이 보일 뿐이다.

 법조인들은 서면에서 양립 가능성에 대해 논한다. 육아에 적용해 보면, 육아는 육체적 노동의 한 범주이고 아이에 대한 사랑과 육아의 힘겨움은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 이혼에 적용해 보면 의지에 따른 혼인관계의 종결과 아이에 대한 사랑도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

 드라마를 보다가 이혼한 엄마가 중학생 딸에게 하는 말을 듣고 터무니없이도 왈칵 눈물을 쏟아버렸다. “기죽지 마, 너 내가 유기농 먹여서 키웠어.”

 이렇게 다소 긴 글월을 굳이 대외적으로 남기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 아이가 나중에 덜 경험한 다른 이의 말로 상처를 받을 때 나도 “기죽지 마, 너 내가 유기농 먹여서 키웠어.”라고 말해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 “기죽지 마”에는 “○○야, 너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으로 인해 ○○가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건 네 잘못이 아니거든. 그 사람들은 그저 경험해 보지 못해서 모르는 걸 수도 있으니 너무 맘 쓰지마. 그리고 엄마, 아빠의 의지에 따른 혼인관계의 종결과 엄마, 아빠의 너에 대한 사랑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어. 이걸 법조인들은 양립 가능성이라 부른다.”를 비롯한 아주 길고 긴 말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이혼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움은 분명 있지만 그저 삶을 살아가는 모양이 다를 뿐이다. “맞다, 틀리다”의 영역이 아니라 “같다, 다르다”의 영역이다. 법조인으로서 또 이혼한 여성이자 한 아이의 엄마로서 내가 지금껏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고 경험해 보지 않은 영역에도 공감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야겠다 다짐해본다.

이청훈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 글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