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회원의 상념
거인의 정원

 어느 마을에 아주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어요. 꽃들이 활짝 피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정원에서 아이들은 신이 나게 놀았답니다.

 정원의 주인이었던 거인은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고함을 쳤어요. “내 정원에 들어오지마! 이 정원은 내 거야.” 거인은 담장을 높이 쌓았어요. 

 그러자 정원에 꽃잎과 나뭇잎이 떨어지더니, 찬 바람이 불고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이 되었어요. 시간이 흘렀지만 이상하게도 거인의 정원에는 봄이 오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꽃향기가 거인의 코를 간질였어요. 거인이 창문을 열어보니, 아이들이 살금살금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 거인의 정원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 아이들이 오지 않아서 봄이 사라졌었구나! 얘들아, 정원에서 마음껏 놀렴.” 거인의 정원에서는 즐거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거인의 정원』, 이제 막 돌이 지난 아기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이 짧은 이야기가 마음을 두드렸다.

 아이들은 그저 제법 시끄러운 존재가 아닌가 생각했던 나는 어느덧 아기 엄마가 되었다. 이제 길을 걷다가, 엘리베이터에서, 혹은 동네 작은 카페에서 마주치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제각기 귀하다. 산책길에 마주하는, 짧고 가느다란 다리로 뒤뚱뒤뚱 열심히 걷고 뛰는 아이들에게서 생명력이 넘친다. 아이들 부모님과 눈인사를 나누다가 조심스레 몇 살인지, 잠은 잘 자는지, 걷기 시작했는지 소소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동네 할머니들은 여지 없이 아이를 향해 기분 좋은 덕담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현대사회’라는 시대의 이름 뒤로 사라졌던 생면부지의 이웃들이 아이를 매개로 다시 나의 방문을 두드린다. 

 지나치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세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그 안의 아이를 본다. 우리는 모두 한때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순수로 가득 찬 어린아이였다. 모두가 저마다 간단치만은 않을 우여곡절 끝에 여기까지 왔다. 그 세세한 하루하루를 미처 다 알지는 못하지만, 오늘 나와 아이가 보낸 하루의 귀중함만큼 다른 이들의 하루도 매일이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탄생과 함께 나의 세계는 놀랍게 확장되었다.

 아이는 닫혀있던 마음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서로 이해하는 법을 알려주더니,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오색찬란한 감정들을 일깨운다.

 아이의 탄생과 함께 수많은 감정의 무수한 스펙트럼이 함께 깨어났다. 처음 ‘엄마’하고 부르던 날, 혹은 마침내 네 발 기기에 성공하던 날과 같은 순간들에는 눈물이 날듯이 경탄했다. 아이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맘마를 양손 가득 들고 먹다가 기꺼이 나에게 한 주먹 나누어 먹여준다. 아이는 초보 엄마의 서툰 손길에 가끔 와앙 울기도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엄마를 용서하고 쪼르르 달려와 말랑말랑한 살결로 품에 와락 안긴다. 일이 많다는 핑계로, 잠이 부족하다는 변명으로 잠시 육아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가도, 아이의 조건 없는 치사랑 앞에 미숙한 나의 내리사랑이 이내 부끄러워진다.

 아이의 사진을 차근차근 되새겨 보다가, 불과 얼마 지나지도 않은 그 순간들이 벌써 그리워진다.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내 품에서 함께 잠들어 줄 시간이 얼마나 될까, 앞서가 미리 서운하기도 하다. 아이들에 관한 사건사고 기사들은 차마 마음이 아파 제목을 클릭하여 볼 수조차 없어, 크게 분노하고 깊이 애도했다. 

 최근 어느 기사에서, 한 성인 남성이 무인결제 가게의 키오스크를 골프채로 손괴하고 현금을 절도해 간 사례가 소개됐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었다. 곧이어 같은 가게를 찾은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한 아이는, 물건을 골라 결제를 하려다 키오스크가 고장 난 것을 발견하고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더니 아이는 자신이 지불해야 하는 900원어치 동전을 주섬주섬 모으더니, 천장에 달린 CCTV를 향해 정성스레 하나하나 동전의 개수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아이는 그 900원을 정성스레 모아 고장난 키오스크 뒤편에 고이 숨기고는 “편의점 주인 아저씨 아주머니, 동전 넣을 곳이 없어서 옆에다 9백 원 두고 갈게요 죄송합니다” 메모를 남기고 가게를 떠났다. 어느 고단한 어른이 망가뜨린 한 가게의 키오스크는 순수한 작은 아이의 방문으로 금세 동화가 되었다. 

 내일이 더 아름다운 미래이기를, 사회가 더 안전한 나설 곳이기를, 지구가 더 살기 좋은 터전이기를, 이 세상에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없기를, 어쩌면 예전에는 내 몫이 아니라 생각했던 낯간지러웠을 소망들에 짙게 진심을 보탠다. 어른들의 복잡한 논리와 따분한 이해로 빛을 잃은 세상에 아이들이 채색해 줄 형형색색의 빛깔이 희망임을 본다. 

 야행성이던 나는, 이른 새벽 단잠에서 깨어난 아가의 햇살 같은 웃음에 경쾌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오래전 덮어두었던 동화책의 이름들을 오랜만에 마주하며, 잊혀진 동심을 뒤적여 꺼낸다. 나의 정원은 이제 봄이다. 

하우정 변호사
● 김앤장 법률사무소

하우정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 글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