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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입문』 역자 서요련 인터뷰

Q. 서요련 선생님은 최근 『하버마스 입문』1)을 번역하셨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현재 연구하는 전공분야를 알려주세요.

 중학교 도덕 교사이고 지금은 휴직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윤리교육과 대학원에서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주전공은 자유주의라는 사상 · 사조 중에서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 현재)가 1995년 실제로 벌였던 논쟁을 중심으로 연구를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Q. 로스쿨을 다니다 진로를 변경했다는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로스쿨 시험기간에 구글 스칼라(Google Scholar)에 접속해 밤새 학자들의 논문을 읽으며 진로변경을 결심했습니다. 학자적 성격이 맞기도 했지만, 수험 중심의 공부에 잘 맞지 않았고 경쟁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지요. 교사라는 대안도 있었고, 대학원에 진학해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싶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결정할 수 있었어요. 임용시험을 단번에 붙었던 것은 실력과 운이 동시에 따라줬기 때문이고, 현재 정말로 만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Q. 하버마스가 제안하는 법과 규범이란 어떤 개념인가요?

 『사실성과 타당성(Faktizität und Geltung)』에 따르면, 법은 사회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때로는 도덕보다 더욱 중요한 규범이 될 수 있어요. 사실적으로 강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은 지키지 않더라도 사회적 비난 수준에 머무른다면, 법은 지키지 않으면 제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재 위협만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규범을 보편적으로 잘 준수하진 않아요. 

 그래서 타당성이 필요합니다. 즉, 법은 타당하다고 추정돼요. 한국과 같은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민주적 절차를 통해 법을 제정하고 권위를 부여하니, 법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고 추정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단순히 ‘이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으니까 지켜야겠다’가 아니라, 이 법을 지킬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죠.

 도로교통법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사람들은 왜 신호 위반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까요? 첫 번째로 사실성의 차원에서, 신호 위반을 하면 과태료를 물게 되니까 신호를 지키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두 번째로 타당성의 차원에서, 신호를 지켜야 하는 까닭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의 안전도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의 안전도 중요하니까 지키겠다는 거죠. 하버마스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하는 것은 오로지 법 규범밖에 없기에, 법이 사회통합의 핵심 메커니즘이라고 봅니다. 


Q.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변호사들에게도 유의미한 개념이 있다면 제시해 줄 수 있을까요?

 철학이라는 학문의 세계 안에서 일정한 지위가 있고 칭송되는 주류 이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변호사들의 세계처럼 극도로 전문화되고 자율적인 영역에 그 이론을 아무런 매개 없이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왈가왈부하는 게 조심스럽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변을 하자면 전문가로서 나름의 윤리관을 세우고자 할 때 하버마스에서 일정 부분 단서를 얻을 수 있어요.

 특정한 개념을 제시하기보다는 이런 유형의 철학이 전문가인 변호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편이 나아보입니다. 만약 변호사님들이 실생활에서 자신의 업무에 치이다가, 한 번 정도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자신의 일을 공적인 시각에서 객관화해 보고 자신의 일이 가진 의미와 공적인 역할을 찾길 원한다면, 하버마스의 철학을 접해보는 것이 도움될 수도 있습니다. 


Q. 하버마스는 언어를 통해 행위를 조정해 가는 과정을 중시하는 철학자로 이해되는데, 그의 이론을 일상 영역이나 법률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버마스는 인간 행위가 언제나 대화나 언어를 사용해서 조정된다고 보는데, 우리는 일상에서 언어를 통해서 행위를 조정할 때 서로 ‘타당성 주장(validity 
claims)’을 교환해서 의사결정을 합니다. 내 말이 참(true)인 사실에 근거하고, 내 말이 정당한 규범에 근거하고, 내 말이 진심에 따르고 있다는 것, 이 세 가지를 합쳐서 타당성 주장이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첫째로 뭐가 사실(fact)이냐, 둘째로 뭐가 옳냐, 셋째로 진심을 따르고 있냐는 거예요.

 보다 전문적인 영역에서는 이와 같이 언어를 통한 행위 조정에 내재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어떻게 잘 구현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특히 이것이 사실문제를 다루는 것인지 규범을 다루는 것인지 모호할 때가 많죠. 만일 논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사실과 규범을 명확하게 분간한다면 좀 더 합의안을 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게 무분별하게 혼재되면 문제해결은 물 건너가고 논의는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죠.

 예를 들어서, 사실관계를 밝히는데 갑자기 “아니, 그래서 이 사실관계가 바람직한 건 아니잖아요.”라고 하면서 규범에 관한 이의제기를 하거나, 규범을 논하는데 “아니, 법이 어떻든 모르겠고 실제로 사람들은 이러잖아요.”라고 하면서 사실관계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거죠. 이 두 가지를 잘 구별하기 위한 절차를 보다 제도적으로 잘 도입한다면 분쟁을 보다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겠지요.


Q. 법원에서는 법과 제도를 비롯해 판사, 검사, 변호사라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직에 의해 사실과 규범을 구별하며 첨예한 논증이 이어집니다. 그에 비해, 변호사들은 불특정 다수의 의뢰인들과 소통하면서 꽤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의뢰인은 사실과 규범이 혼재된 채 주장하기도 하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한대로 사실관계를 재구성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를 구별하는 게 쉽지 않고, 구별한다 하더라도 의뢰인과 소통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지요.

 하버마스의 이론을 법조인들의 사회적 역할과 연결해 본다면, 이런 이야기를 좀 더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의뢰인들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하소연을 하기도 하고 감정적인 울분을 담아 자신의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의뢰인들의 주장에는 사실관계, 규범과 내심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렇죠? 이때, 변호사는 의뢰인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 잘 번역을 해서 법률가의 언어로 사법부에 이러이러한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청구하는 대리인이죠. 

 그렇다고 해서 변호사가 ‘하버마스의 이론을 생각하면서 의뢰인의 주장을 이렇게 번역해야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변호사는 그냥 하던 대로 법대나 로스쿨에서 배우고, 현장에서 실무를 하던 대로 그냥 의뢰인의 말을 잘 듣고, 서면을 잘 작성해서, 법원에 잘 제출하면 돼요. 그런데 일부 사안의 경우, 가령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거나 일부 민사재판이나 형사재판에서도 단순한 전형적인 사례가 아니라 정말로 의뢰인의 목소리를 잘 번역해서 전달해야 될 때가 있어요.

 이럴 때는 좀 달라지는 거예요. 그저 하나의 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재판이 좀 더 사회적으로 나은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의뢰인을 비롯해 공론장에서 형성된 나름의 여론이 있을 것인데, 그러한 여론이 보다 법의 언어로 변환되어 사법부에 전달될 수 있도록,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합리적인 해법을 도출하는데 변호사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요.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대부분의 변호사는 하던 대로 일하면 되고, 문외한인 제가 거기에 말을 덧붙이는 것은 부적절한 일입니다. 다만, 개인적인 사명감이나 사회적 이슈가 될 수 있는 사건에 관여하는 법조인의 경우, 보다 자신의 역할을 명료하게 재정립하는 데 하버마스의 이론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Q. 유의미한 의사소통을 지향하면서도, 분쟁을 다루는 현실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오해들도 많고, 무의미한 대화들도 많습니다. 가령, 법률상담을 하다 보면 분쟁을 겪는 당사자는 상대방과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답답함을 호소하거나 상대방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거든요.
 
 유의미한 대화를 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일지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하버마스의 철학적 작업입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말할 때 참이라고 전제하지 않는다면 유의미한 대화가 될 수가 없고, 블러핑만 하는 대화를 나누게 돼요. 서로 이해할 수 있어야 오해도 판명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러니까 각자에게만 참인 말을 하면, 상대방이 말하는 게 전부 다 거짓처럼 보이는 거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일단 의심부터 하는 거예요. 이런 관계에서는 유의미한 대화가 나올 수 없죠. 

 그러니까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라고 하는 태도에 전제되는 것은,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이 참일 것이고 혹은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내가 어느 정도 인정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전제되어야 우리가 거꾸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도 얻게 되고, 그 다음 기만과 강제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해서, 강제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내심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온 합의를 한 것인지까지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는 오해는 이해
를 전제로 해야 비로소 오해로 판명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Q. 변호사는 늘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논증을 해야 하는 직업인입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좋은 논증이란 어떤 것인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근거를 제시하고 누구의 말이 맞는지 따지고 하는데, 그것 자체가 논증대화(discourse)입니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논증대화의 목적은 상호 이해와 동의에 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가 하는 논증의 목적은 승소이거나 의뢰인의 이익을 구현해 주는 것이지, 일상적인 논증이나 하버마스가 제안한 개념과는 목적 자체가 달라요. 재판이라는 보다 특수하고 전문적인 제도로 가지고 올 경우 어느 정도 맞닿는 부분이 있어요.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황시목 검사(조승우 배우)가 후배 검사인 영은수(신혜선 배우)에게 “어떻게 이길 건데?”라고 물어봐요. 영은수는 잡무만 처리하다가 진짜로 정식 재판에 들어가는 신참 검사입니다. 황시목으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길 것인지에 관해 전략을 물어보는 거예요. 이처럼 재판에서 검사이든 변호사이든 자기가 할 수 있는 논증을 열심히 하면 되고, 그렇게 각자의 논증으로 다툴 때 법관은 두 논증을 저울질해 보고,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면 “보다 나은 논증의 강제 없는 강제(unforced force)”에 따라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판결을 내리면 되는 것이겠지요. 물론 논증을 저울질하는 최상 기준은 법리일 것입니다.

 강제란 말의 뜻은 그 사람이 실제로는 원치 않을 텐데 결국 하게 만드는 것이죠. ‘강제 없는 강제’란 말은 굉장히 역설적인데, 토론을 하다 보면 상대방의 말이 진짜로 맞고, 근거도 탄탄해요. 그러면 인정하기 싫을 거고 짜증도 나겠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보다 나은 논증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 논증에 따라서 대화의 향방이 결정되어 버리는 거예요. 말문이 막혀버릴 정도로 탄탄한 근거를 제기해서 논증을 구성하는 상대방을 보면서 느끼는 무력감, 그것이 ‘보다 나은 논증에 의한 강제 없는 강제’란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굉장히 이상적인 개념이죠. 현실의 재판이 그렇게 굴러간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순진한 이야기예요. 하지만 우리가 지향점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거예요.

 

● 인터뷰/정리 : 서유경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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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임스 고든 핀레이슨(James Gordon Finlayson), 『하버마스 입문』, 번역 서요련, 출판사 필로소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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