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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유한) 동인 이성보 변호사 인터뷰

Q. 회보의 인기 코너 ‘선배법조인의 조언’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호사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사법연수원 11기를 수료하고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사법연수원 교수, 청주지방법원 · 서울동부지방법원 ·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장을 거쳐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공직 생활을 마쳤습니다.

 이후 2016년 변호사로 개업해 2019년부터 법무법인(유) 동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Q. 1984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법조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법원을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려서부터 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법원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판사가 정말 천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랬느냐고 하면 이유를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부모님이 판사가 되라고 하신 것도 아닌데, 저는 어릴 때부터 판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Q. 윤관 대법원장님 시절 법원행정처에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당시 윤관 대법원장님께서 대대적인 사법제도 개혁을 했었어요. 사법제도발전위원회 연구실판사로서 엄청난 고생을 했죠(웃음). 그 개혁의 결과 영장실질심사와 기소 전 보석제도를 도입하고, 특허법원과 행정법원을 신설했습니다. 내부적으로 법관 평정 제도도 공식적으로 도입을 했고요. 서울민사지법과 서울형사지법을 통합하여 서울중앙지방법원을 탄생시켰고, 서울 시내 지원들을 지방법원으로 승격시켰으며, 사법보좌관제도도 도입하였습니다.

 제가 판사가 된 이후에도 한참 동안 1심 행정재판을 법원에서 하지 않고 행정심판으로 대체하고 고등법원에 1심이 제기된 후에 대법원으로 갔습니다. 사실상 오랜 기간 2심으로만 운영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지요.

 그때 함께 해결하지 못한 것 중 하나가 공정거래 사건입니다. 공정거래 사건은 지금도 서울고등법원이 1심입니다. 공정거래위원회 측은 스스로 심판 기능이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제가 서울고법에서 공정거래 전담재판장도 했었지만, 글쎄요.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때나 자료 내놓으라고 하고, 그 권한은 검찰보다 강할 수도 있는데, 아무런 제한이나 견제가 없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공정거래 사건도 1심을 지방법원 단위에서 재판하도록 제도개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Q. 약 28년의 법원 생활을 한마디로 자평하면 법관으로서 어떤 법관이셨나요?

 한마디로 자평하기가 참 쉽지 않은데, 좋은 결론을 내기 위해 나름대로 신중한 노력을 했던 판사라고 생각합니다. 

 법관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늘 두려움을 갖고 매사건마다 오판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젊은 판사 시절부터 재판 전날은 절대 저녁 약속을 안 잡았어요. 재판을 받으러 오는 당사자들도 마음을 두근거리면서 법정에 오겠지만, 저도 항상 상당히 긴장을 하고 법정에 들어갔습니다. 어떻게든 실체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서 억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재판을 했습니다.

 형사 단독 판사를 하면서 기억나는 일이 있어요. 동기 중에 서울형사지법에서 형사 단독을 제일 먼저 하게 되어 당시형사 단독들 중에는 제일 막내였는데, 선배들이 하는 재판이 솔직히 조금 마음에 안 들기도 했어요. 벌금형 해주고, 다음에는 집행유예 해주고, 집행유예 기간이 지나면 또 집행유예 해주고 하는데, 이래서 사법의 정의가 서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변호사의 말이 제가 서울구치소에서 악명이 높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사람이 한 번은 실수할 수가 있고 어떤 죄를 지을 수가 있지만 두 번째부터는 실수가 아니고 악성(惡性)의 발현이고 그 사람은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재판했던 것 같습니다. 

 기소유예 전력이 한 번 있는 피고인에 대하여 실형을 선고하니까 직원들까지 놀라움을 표시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언젠가 시국 사건을 재판할 때 재판을 받는 한 서울대학교 학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하라고 했더니, ‘판사님이 엄정한 재판을 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판사님은 좋은 환경에서 이렇게 잘 성장하셨지만 피고인들에게는 판사님이 모르는 어려운 사정들이 있으므로 그런 것들을 좀 헤아려 주시는 재판을 하셨으면 좋겠다’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재판을 할 때 조금씩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


Q. 2012. 12.부터 2015. 12.까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어떻게 가게 되신 건가요?

 판사 생활을 한 28년 8 ~ 9개월 정도 하고, 서울중앙지방법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데 갑자기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자리가 비었는데 이를 맡을 의사가 있느냐고 하면서, 다음날까지 답을 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날 중으로 가까운 법조인 두 분과 가족들과 상의를 해서 수락을 했습니다.


Q. 오랜 기간 판사로 재직하시다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으로 가 보시니 어떠셨나요?

 당시는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고, 취임한 후 일주일 뒤였나 대통령 선거가 있었거든요. 약간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새 정부에서 유임이 결정되어 3년의 임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부패방지, 고충민원처리, 행정심판, 제도개선권고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법관 출신이 위원장으로 역할을 하기에 적절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Q.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재임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른바, 김영란법)을 제정한 것이었죠. 대학 동기인 김영란 전임 위원장이 이 법을 제정하겠다 해서 국무회의에 보고했는데 분위기가 싸했다고 해요. 공무원들 중 그 법을 환영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사실 좀 이상한 법이지요(웃음). 

 돈이 오고 가지 않고 청탁만 해도 무슨 처벌을 받고 이러니까요. 뇌물죄가 형법에 있는데, 거기서 요구하는 구성요건인 대가성이라든지 직무 관련성이라든지 이런 걸 안 따지고 그냥 액수만 따져서 얼마 이상이면 무조건 처벌한다고 하니까 그런 게 말이 되냐는 반응이 많았죠. 저의 위원장 임기 내내 고생고생해서 15년도 3월에 국회 통과가 됐습니다. 


Q. 동인에서는 주로 어떤 역할, 사건을 수행하고 계신가요?

 민,형사, 행정 등 송무사건과 함께 국민권익위원회 사건들도 가끔씩 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사건을 많이 수행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사건을 피하지는 않습니다.


Q. 평소 즐기는 취미가 있으신가요?

 음악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최근에는 오페라를 아주 열심히 보고 들어요. 유튜브의 오페라 해설 동영상을 자주 보고, 풍O당에서 만든 동영상 강의도 자주 시청하는데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풍O당 동영상 강의 하나가 2~3시간 정도인데, 집사람하고 둘이 열심히 봅니다. 어느 음악평론가에 의하면 지금까지 만들어진 오페라가 한 400편 정도 되고, 그 중 흔히 공연되는 것은 100편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100편을 1회독(?) 이상은 한 것 같습니다. 같은 오페라도 연출자나 출연가수에 따라 여러 번 감상한 것도 많습니다.

 사무실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하루 종일 조용하게 틀어놓고 듣습니다. 


Q.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가 누구신가요?

 인간의 영역을 신의 영역에 연결해 준 작곡가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합니다.


Q. 살면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 집사람을 만난 거예요. 사실 우리는 초등학교 동창생입니다. 집사람이나 저나 부산 출생인데 둘 다 4살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제가 초등학교 어린이 회장을 할 때, 집사람이 부회장을 함께 했지요. 그렇다고 초등학교때부터 연애를 한 건 아니고요(웃음).

 초등학교 졸업 후 대학 때, 서클을 같이 하면서 다시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같은 학년 여학생들에게 말을 높여서 했는데, 집사람이랑은 초등학교 동창이니까 처음부터 말을 편하게 했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여학생들보다 친구처럼 가까이 지냈죠. 2학년을 마치고 서클활동을 그만두고 각자 공부를 하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그 후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직후인 1978년 6월 9일에 집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치아의 날이라고 하여 전국의 치과대학(당시 3개밖에 없었음)이 모여서 체육대회를 하는데, 그해에는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형 될 사람도 보고, 집사람도 보려고 운동장에 갔어요. 그런데 집사람이 저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하면서, 중앙도서관에 있는 휴게실에 가서 차 한잔 사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날 오후 내내 이야기를 하다가 비가 오는 가운데 비닐우산을 함께 쓰고 광화문에 나가 저녁 같이 먹고 하면서 연애가 시작되었어요. 그 후 집사람이 치과대학 졸업하는 걸 기다렸다가 사법연수원 수료 직전에 결혼하였지요. 


Q. 다시 태어나신다면, 그때도 법조인이 되실 것인가요?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법조인은 안 할 것 같습니다. 권익위원장 시절 국무회의나 국회에 가서 장관들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똑똑한 사람이 법조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시 태어난다면 멋있는 정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혼탁한 정치환경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요.


Q. 시간 터널을 발견해서 1984년의 이성보 초임 판사를 딱 5분 동안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실까요?

 네가 판사로서 하는 판단이 얼마나 중요하고, 세상에 어떤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것 같습니다. 다소 진부한 표현이지만, 판사는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굉장히 중요하고 큰일을 하는 사람이므로, 호연지기를 가져라. 매 사건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Q.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2023년의 후배변호사들에 대한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작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나중에 큰일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현재의 상황은 자신이 세워 둔 목표를 위해 준비하는 단계라고 생각하고, 사건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수행하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 인터뷰/정리 : 황귀빈 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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