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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태자 이야기

 설악산으로 향하는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다물교차로(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 우회전하면 446번 지방도로 들어선다. 상남면을 관통하여 홍천군 내면으로 가는 도로다. 전에 차를 몰고 이 길을 통하여 상남면으로 간 적이 있다. 가다 보니 도로 안내판에 ‘김부대왕로’라고 되어있었다. 김부대왕? 이 산골짜기에 김부대왕이라니? 호기심이 부쩍 당겨 자료를 찾아보았다. 김부대왕은 마의태자를 말함이었다. 마의태자가 이곳에 머물렀다면서 동네 이름도 아예 ‘김부리’다. 별명으로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고, 정식 행정지명이다. 그리고 김부리를 중심으로 남면과 상남면에는 곳곳에 마의태자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래서 상남면에서는 상남리의 용소마을을 비롯한 근처 4개 마을을 마의태자권역마을로 지정하고, 매년 마의태자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김부리의 마을을 마의태자권역마을로 지정하지 않은 것은 김부리의 대부분이 1996년부터 육군 과학화 훈련장으로 수용되면서, 마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정사(正史)에는 나오지 않는 마의태자 이야기가 이곳에 널려있을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정사에는 이렇게 나온다. 신라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경순왕은 935년 나라를 들어 고려에 바친다. 이때 아들 마의태자는 어찌 천년 사직을 그렇게 가볍게 넘겨줄 수 있느냐고 반대한다. 그렇지만 대세는 이미 기운 것, 결국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경주를 떠나 금강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친다. 다만 정사에는 그냥 ‘태자’라고만 나오고, ‘마의태자’는 춘원 이광수가 소설 『마의태자』를 내면서 일반화된 명칭이다. 춘원은 태자가 일생 동안 삼베옷(麻衣)만 입고 거친 음식만 먹고 지내다 일생을 마쳤기에 마의태자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정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의태자 이야기가 남아있는 곳이 여기저기 있다. 이야기가 있는 곳을 이어보면 마의태자가 경주를 떠나 북상하던 중간 중간에 이야기를 남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마의태자 이야기가 있는 곳에는 이설(異說)도 있긴 하나, 이를 무시하고 마의태자만 찾아간다. 우선 마의태자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다. 마을 이름 자체가 마의태자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여 태자리이다. 그리고 마의태자는 그 마을 용두산에 올라 자신이 떠나온 경주를 바라보곤 하였다는데, 그래서 봉우리 이름은 국망봉(國望峰)이고, 마의태자가 앉았다는 바위는 마의대(麻衣臺)이다.

 안동을 떠난 마의태자는 하늘재를 넘었다. 영남 지방에서 충청, 경기로 넘어올 때 조선시대에는 새재를 많이 이용하였지만, 신라 때만 하더라도 하늘재를 많이 이용하였다. 하늘재를 넘어 내려가면 남한강 상류에 미륵대원 터가 있고 여기에 미륵불이 세워져 있다. 전설에는 이 미륵불을 마의태자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곳에서 좀 떨어진 월악산 덕주사에 마애불이 있는데, 이 마애불은 마의태자의 여동생 덕주공주가 바위에 새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덕주사다. 그리고 이 미륵불과 마애불은 멀리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남매의 애틋한 시선으로... 여기에 덕주공주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면 마의태자는 여기까지는 여동생과 같이 왔나 보다. 그러나 신라 회복의 뜻을 품은 마의태자는 붙잡는 동생을 뿌리치고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내려간다. 홀로 남은 덕주공주는 비구니가 되어 평생 오빠를 위해 기도했으리라.

마의태자의 여동생 덕주공주가 바위에 새긴 마애불

 하늘재를 넘어온 영남인들은 보통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경기지방으로 간다. 마의태자 역시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양평에서 내렸다. 그리고 양평 용문사에 지팡이 하나를 꽂는다. 이 지팡이에서 뿌리가 내려 은행나무가 자라 지금 우리가 보는 우람한 은행나무가 되니,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마의태자를 떠올린다. 양평을 떠난 마의태자는 홍천 지왕동으로 간다. 마의태자가 이곳을 지나갔다 하여 지왕동(至王洞)이라 한다. 그리고 지왕동에서 인제 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왕터라는 곳이 있는데, 왕이 넘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마의태자는 이곳을 지나 계속하여 행치령을 넘어간다. 행치령을 넘으면 바로 인제군 상남면이다. 행치령에는 마의태자 노래비(정두수 작사, 임종수 작곡)가 있다. 유튜브를 찾아보면 조영남 씨의 시원한 목소리로 마의태자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이렇게 행치령을 넘어간 마의태자는 드디어 김부리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 일대에는 그 어느 곳보다 마의태자 이야기가 널려있다. 우선 지명을 보자. 위에서 다물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446번 지방도로를 탔다고 하였는데, 근처 마을에 윗다무리, 새다무리가 있다. ‘다물’은 옛땅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마의태자가 김부리에 터를 잡고 신라 회복 운동을 하였다고 하여 ‘다물’이란 이름이 동네 이름에 들어갔다. 맹개골이라고도 있는데, 이는 마의태자의 오른팔이 되어 신라 회복 계획을 추진하던 맹 장군이 머무르던 동네라고 한다. 이외에도 군사들 군량을 보관하던 군량밭, 죄수를 가둬두던 감옥이 있던 곳이라고 옥터골 등이 있고, 옥새를 보관하였다는 옥새바위가 있다. 그리고 대왕각이라는 제당이 있는데, 대왕각에선 지금도 여전히 매년 마의태자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 갑둔리에서 발견된 오층석탑은 마의태자를 기리는 탑이라고 한다. 한편 설악산 옥녀탕 계곡을 오르다 보면 한계산성이 나오는데, 마의태자 이야기는 여기에도 있다. 아마 마의태자는 고려 진압군이 김부리로 공격해 올 때 여의치 않을 경우 한계산성에 들어가 항전하려고 했던 것 같다. 

마의태자를 기리는 오층석탑

 그런데 이렇게 신라 회복 계획을 착착 추진해 나가던 도중 맹 장군이 갑자기 죽는다. 그러자 오른팔을 잃은 마의태자는 실의에 빠져 신라 회복의 원대한 뜻을 접는다. 그리고 김부리를 떠나 금강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진부령도 마의태자 김부가 넘은 고개라고 하여 김부령이라고 한 것이 음운변화를 일으켜 진부령이 된 것이라고 한다. 진부령을 넘은 마의태자는 이후 정사에 나온 대로 금강산 입구의 단발령에서 머리를 깎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그래서 금강산에는 마의태자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태자릉이 있다. 

 마의태자는 금강산에서 일생을 마쳤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금사(金史)에는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의 7대조 김행(법명 : 함보)이 신라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바로 마의태자의 후손 김행이 계속 북상하여 여진족 땅으로 들어가 여진족 여인과 결혼하였고, 7대손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운 것이다. 금나라 멸망 후 여진족은 400년이 안 되어 다시 한번 일어서니 후금이다. 나중에 ‘청’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자신이 금나라의 후예임을 나라 이름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성은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생각한다는 아이신줘러(愛新覺羅)이다. 마의태자의 후예들이 청나라까지 이어진 것이다.

 처음 김부리에서 김부대왕로 이정표를 보았을 때만 하여도 마의태자 이야기가 청나라 황실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비운의 마의태자! 그가 김부리에서 계속 신라 회복운동을 펼쳤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흘렀을까? 이루지 못한 역사는 상상의 역사로 펼쳐짐이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마의태자 이야기를 마친다.

양승국 변호사
● 법무법인(유) 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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