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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 전체의 취지

 지난 연말 송년모임에서 만난 동료변호사가 불쑥 유창한 영어로 “Fiction is the lie through which we tell the truth-소설(허구)이란 거짓말을 통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 라고 하면서 자기가 겪고 있는 소송 이야기를 꺼냈다.

 변호사 배지를 달고 법정에 출석할 때마다 ‘진실과 정성’을 다짐하며 가지만, 막상 변론을 마치면 허탈한 기분이 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수십 건 나열된 사건 일정표 가운데 내 사건의 심리에는 겨우 5 ~ 10분 정도 허용되고, 그 짧은 시간 속에서 공격 · 방어를 통한 실체진실 발견이라는 재판의 사명을 다하기는 역부족이라고 탄식했다.

 그가 이야기한 사연의 줄거리는 이렇다. 소송물 가액이 3,000만 원으로 매우 소액이고 쟁점도 간단한 임금청구 사건이라, 원고가 제출한 근로계약서(갑1호증)와 그 전후 원 ·피고들 간에 주고받은 이메일이나 사진 등 주요 서증만 비교해 보면 고용주인 피고 귀책 사유가 쉽사리 인정될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1심에서 뜻밖의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소 제기 이후 2년 가까이 지원 -> 시군법원 -> 다시 지원으로 이리저리 이송되고, 피고의 송달기피로 주소보정과 공시송달에 의한 진행으로 소송이 지연되다가, 막상 변론기일이 지정되니 피고는 간략한 답변서만 지참한 채 법정 출석해서 구두 진술을 통해 근로(계약)자인 원고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응소태도를 보였다. 민사소송법의 이상인 신의성실 원칙에 비추어 볼 때 피고들의 태도는 낙제점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1심 법원은 원고더러 피고 학교의 근로자이거나 근로의무를 이행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피고 측의 지시를 받고 음악교사 물색, 온라인 교육과정 자료수집 등 업무 수행한 서증이 다량 제출되었는데도, 그 서증들의 증명력을 전부 배척하고, ‘변론 전체의 취지’를 원고에게 불리하게 적용해서 전부 패소 판결을 내렸다. 

 쌍방 서명한 근로계약서를 신뢰한 외국인 원고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피고 학교를 법인격 없는 사단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소 각하 판결을 내린 것은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었다. 원고의 고용노동청 임금체불 신고 이후 피고 학교가 국세청 폐업신고를 하긴 했지만, 현재도 홈페이지를 통해서 학생 모집을 하는 등 실체가 뚜렷한 교육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정성껏 변론에 임했는데도, 당사자가 직접 소송 수행한 피고들보다 재판장 설득에 실패했다는 자괴감과 함께, 밀린 임금을 한 푼도 못 받아 주었다는 안타까움이 들었다는 무명 변호사의 고백이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의뢰인에게 항소를 권유했다. 소액사건인데 생활자금이 넉넉지 않은 외국인 거주자에게 인지대 등 소송비용을 추가 부담시켜서 미안한 마음이 들고, 항소심 변론 부담은 커서 사무실 운영에 지장이 있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고 실토했다.

 항소 이유의 주요 쟁점은 민사소송법상 자유심증주의의 판단기준으로 ‘변론 전체의 취지’의 적용 한계를 핵심으로 삼았다. 피고의 변명은 ‘계약은 지켜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라는 로마법 이래 보편적인 ‘계약책임 원칙’에 어긋나고, 결국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인본주의적 헌법 이념인 근로조건의 ‘인간의 존엄성’ 보장(헌법 제32조 제3항)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역설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미인가 대안학교의 법인격 존부 및 당사자능력 유무는 당사자의 증거제출만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법원의 직권조사 사항이다. 소 각하 판결에 의해 그런 탈법적 행태가 일반 사회에 용인된다면, 비슷한 제3의 피해 발생을 막기 어렵다는 그 친구의 논리에 공감이 간다. 법원이 ‘변론 전체의 취지’만을 갖고 당사자 간에 다툼 없는 ‘기본 서증의 증명력’까지 배척하는 것은 정말 신중해야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항소심 첫 기일은 3월 초에 열린다. 만일 원심 판결 결과가 그대로 확정된다면, 근로계약서보다 고용주의 구두 진술에만 의존하여 ‘변론 전체의 취지’를 거꾸로 판단한 제1심의 판시 이유가 정당화되는 결과가 될 테니 친구의 사명감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원고 승소 판결을 얻더라도 그 후 민사집행 절차를 통해 강제 변제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의뢰인에게 새로운 희망 고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의뢰인을 위해선 하루빨리 재판부에 조정 신청을 해서 실제 임금 변제를 받는 게 우선이 아닐까 충고하고 싶다.

 부디 사랑하는 내 친구 변호사가 심기일전해서 새 봄에는 멋진 승소 사례를 전해 주기 바란다.

정진섭 변호사
● 법무법인 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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