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헤아려 보니 내가 읽는 책의 80%는 소설이다. 소설 속 천차만별 등장인물들이 처해진 환경, 그 속에서 그들이 자신만의 기질, 능력, 감성으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내게 적잖은 위로와 교훈을 준다. 소설이 내게 주는 즐거움과 유익은 일일이 표현해 내기 어려울 정도지만, 인간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마음을 뜨겁게 해 주는 힘 역시 큰 부분이 된다.
신기하게도, 삶을 유쾌하고 즐겁게 그려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내 마음 깊은 곳의 애잔함을 이끌어내어 모르는 사이에 숙연해지기도 하고, 반대로 극도의 암울하고 절망적인 인생을 그리는 비극을 보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팍팍한 세상을 살아갈 힘과 감동에 두근거리게 되기도 한다. 『로드』는 후자의 경우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을 쓴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코맥 맥카시(Cormac McCarthy)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책 『로드(The Road)』는 디스토피아 혹은 세기말의 세상에서 죽음을 피해 길을 걷는 아버지와 아들을 담담히 그린 이야기이다.
그들 부자가 걷는 고통스럽고 황폐한 세상은 그보다 더 절망적일 수는 없을 정도이다. 숲과 나무는 불에 타고, 하늘은 재로 가득해 햇빛을 가리며, 얼마 남지 않은 강물은 재로 새까맣고, 인간이 가득했던 도시와 마을은 식량이 바닥난 채로 시체만이 가득하다. 매일매일 어두워져 가고 추워지는 세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은 서로를 사냥한다. 엄마가 그러했듯이, 무력한 인간으로 이런 상황에 순응하는 방법은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아들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아버지는 각혈을 하며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붙들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그들을 죽게 만들 추위를 피하기 위해 생명에의 희망을 찾아 남쪽으로 쉼 없이 길을 걷는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그들은 길 위를 걷는다. 순진한 독자처럼 희망을 품고 이야기를 읽어 가던 나는 더 이상 그들에게 희망이 없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그들에겐 끝까지 황폐함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슬픔이란 감정도 사치스러운 절망의 바닥이다.
그러나 그 절망의 바닥에서 나타난 모습, 책의 마지막 몇 페이지 속 이야기는 그 장면만을 보는 사람은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슬픔과 감동, 삶에 대한 희망을 준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암울한 세상에서 특별하지 않은 것 같은 이야기로 가슴 떨리는 희망을 느끼게 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름도 알 수 없이 그저 남자와 소년으로 지칭되는 아버지와 아들을 통하여 얻는 감동은, 독자들로 하여금 온전히 두 인물의 마음과 각 상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작가의 힘이다.
책의 원제가 ‘A Road’아닌 ‘The Road’로, 주인공들이 걷는 길이 일반적인 길이 아닌 순례의 길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분명 ‘The road’가 맞을 것이다. 올해 초등학생이 된 아들 녀석이 옆에서 자고 있는 모습 때문일까. 내 심장은 나의 몸과 마음속에서 나의 ‘그 길’을 걷는 걸음이 되고, 나의 걸음은 그 걸음 자체로 나에게 희망이 된다.
이산해 변호사
사법시험 제48회(연수원 38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