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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음] 어느 지긋지긋한 날의 행복
어느 지긋지긋한 날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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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 시인
2006년 <제15회 전태일문학상> 수상하며 등단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 
2014년 제4회 조영관문학창작기금 수혜 

아프다는 핑계로 결근을 하고 
책상에서 나와 함께 통증이 사라졌을 때

갈 곳 없어진 통증은 

내 머리맡 가려운 시간에서도 
보글거리는 싱크대 설거지통 그릇에서도 
악다구니 쓰는 아래층 여자에게서도
우리 집 고양이의 고요한 잠 속에서도

날마다 숨어 자라나다가

환상이라는 것이 생겨났을 때 행복하게 찾아오네

저녁이 사라진 삶에 야경은 전등의 통증들
용서를 선물할 때 쯤 찾아오는 눈물의 통증들
벽을 보고 말라죽을 거라는 애인은 불안의 통증들
엎드려 희망을 이야기하는 우울의 지방덩어리 같은 통증,
통증들

침묵이 태어나는 새벽 근처에서
태양이 명멸을 기다리며 서성서릴 때
통증은 그제야 보란 듯 책상 한 가운데 
나와 함께 앉아있네 

지긋지긋한 나날들의 행복은 통증과 함께 찾아오네 

 


제가 다니던 회사는 매월 말이면, 매년 말이면 뭐가 그리 보고할 것이 많은지 정신이 없었어요. 한 달을 마무리하는 결과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결과물로 서류는 쌓여만 가고 보고서의 양은 계속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야근하는 저녁 무렵 유리창에 붉은 잔상을 남기며 사라져가는 해를 바라볼 때가 있었어요. 빛이 사라지기 전에 거리는 가로등이 켜지고 빌딩들은 햇빛을 머금은 유리창처럼 하나 둘 빛을 비추었지요. 밤은 어두워져야 하는데 밤이 될수록 더 밝아졌습니다. 외국 관광객이 서울은 야경이 ‘원더풀’이라고 환호할 때 어떤 이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하네요. “야근을 많이 해서 그런다”고. 농담처럼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그런 것 같았어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밤도 어쩌면 밝은 저 빛들 때문에 아프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증이라는 것은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고, 도시에 사는 저 또한 여기저기 아픔이 보이기도 하고 느끼기도 합니다. 

오래 전 어느 날, 아프지도 않은데 아프다는 핑계로 회사로 가던 발길을 돌린 적이 있었어요.(들키지는 않았어요. 제가 거짓말을 정말 잘했거든요.) 일이 너무 많아 숨 쉴 수 없는 그런 날 있잖아요. 통증 이라는 것이 찾아온다면 어떨까, 아플 때 찾아오는 통증의 다른 이야기는 없을까 생각했어요. 야근하면서 밝게 빛나는 전등을 쳐다보며 저녁이 사라진 삶에 대해 슬퍼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밝은 웃음 뒤에 어쩌면 감추고 싶은 통증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정말 미워하던 사람이 나에게 용서를 빌 때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떤 통증일까, 헤어진 애인에게 휴대폰으로 긴 문장을 쓰고 전송을 누를까 말까를 고민하는 마음의 통증을 느끼고, 희망이라는 단어가 전혀 쓸모없어진 옥탑방의 친구를 생각하다가 왼쪽 가슴 부근이 찌릿해오는 아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건 할 일 없어진 하루를 온전히 내 마음으로 보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꼬깃꼬깃한 절망과 슬픔과 외로움이 나와 함께 할 일이 없어진 것이겠지요. 

다시 출근을 해서 야근을 하고 다시 아침을 맞이하고 다시 애인과 사랑을 나누고 다시 용서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부메랑 같은 소소한 행복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찾아오는 행복이 소중한 건 아픔의 통증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실연의 아픔이 없었다면 새로운 사랑에 대한 행복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가 없었다면 시원한 바람처럼 찾아오는 가벼움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어둠이 없다면 밝은 빛에 대한 동경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저런 아픔을 겪고 성장해 나아가는 것인가 봅니다. 

이 시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아프다고 멀리하고, 괴롭다고 외면하고, 힘들다고 그만둔다면 숨어있다 불쑥 찾아오는 희망과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회사를 그만 둔 지금 돌이켜보면 야근을 했던 힘든 기억들 속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이야기들이 있어 행복하지 않았나 싶어요. 아픈 통증을 딛고 일어서는 건 함께 아파하고 함께 걱정해 주는 그 누군가를 기다리는 판타지를 갖고 살기 때문이 아닐까요. 도시 속에서 살고 있는 저는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고, 관심 밖의 사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시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잠깐 짬을 내어 자세히 주위를 돌아보면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지도 몰라요. 하루 정도는 그래도 되잖아요. 행복한 환상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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