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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두드림] 그녀의 암호명은 ‘여명의 눈동자’
2016년 자유민주주의가 만개한 대한민국에서는 희미한 기억의 역사가 되겠지만, 잊혀진 이야기 속에서는 여전히 헤어짐과 찢김의 아픔을 이겨낸 사람들이 남아 있다. 
‘여명의 눈동자’라고 불린 여자, 북파간첩 윤여옥. 그녀는 사법부로부터 사형판결까지 받은 인물이다. 미군 OSS첩보요원으로도 활동했던 그녀가 북한의 간첩으로 탈바꿈하기까지는 장하림, 최대치라는 두 남자에게 그 문제의 실마리가 있다. 남·북, 좌·우로서 서로를 극렬히 미워하고 대립해야 했던 남자들 사이에서 결국 여옥이 극한의 상황까지 내몰렸기 때문이다. 
서울 출신이자 동경제대 의학부 일본군학도병으로 시작하여 미군 정보부 요원, 한국군 장교로 거듭난 장하림, 개성출신 북경대 유학생 일본군학도병 시절을 이겨내고 팔로군과 인민해방군(북한군) 장교를 거쳐 빨치산으로 생을 마감한 최대치, 남원출신의 처녀로서 종군위안부로 만주와 남경, 사이판을 전전하다 미군OSS요원에서 북파간첩으로 사형수가 된 윤여옥. 이 세 주인공들의 숙명적 만남과 이별 그리고 해후는 격동의 현대사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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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종 작가의 장편소설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강점기(태평양전쟁), 해방정국, 한국전쟁을 관통해 가면서 한국인의 웅혼한 생명력을 찬미하면서도 민족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놓은 바 있다. 또한 작가는 험난한 역사의 파랑에서 지독한 애증을 해야만 했던 윤여옥, 최대치, 장하림의 비련을 생생하게 재현하고자 했다. 
윤여옥이 종군위안부로 끌려가는 “대륙의 밤”부터 시작하여 장하림이 보는 가운데 최대치가 여옥의 묘에서 자결하는 “비(碑)”로 끝나는 소설 『여명의 눈동자』. 원고지 1만 3천여 페이지의 긴 소설은 태평양전쟁 이후 7년여 동안 한·중·일을 넘나며 그 시·공간마다 주인공들의 다채로운 자취를 남겨 놓았다.
서문에서 작가는 결연히 밝힌다.

한국 현대사를 대하고 있으면 슬픔과 분노 그리고 좌절을 동시에 맛보게 된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 피의 장강을 뗏목을 타고 한번 헤쳐가 볼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항해하는 동안 느낀 것은 슬픔, 분노, 좌절의 저 쪽에 자유의 불꽃이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강처럼 많은 피를 흘렸고 무수한 꽃봉오리들이 무참히 쓰러져갔다... 아직 비바람이 치고 하늘은 어둡다. 그러나 머지않아 자유의 빛이 보일 것이다. 그 자유의 빛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쉬지 않고 노를 저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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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국적으로 작가는 최대치와 장하림으로 대표되는 좌우진영·남북이념 대결의 승자를 판정하는 것보다, 그 혼돈의 시기에 자유와 광명을 바랐던 동시대인들의 염원을 기억하고 험난한 파도 속에 흔들리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우리네 한국인을 기억하려 한 듯하다. 또한 작가는 상처받은 약한 여성이었으나 나중에는 좌우대립과 남북상잔을 모두 아울렀던 윤여옥을 통해서 시대의 아픔을 껴안는 ‘모성의 미학’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제 작가는 “여옥과 대치는 죽었고 하림은 상처 입은 몸으로 어둠 앞에 서 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둠 저 쪽에서 움터오는 여명의 빛이다. 그는 확신을 안고 그 빛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며 세 주인공의 질긴 인연을 매듭짓는다. 
이 소설은, 작가가 책을 엮으면서 “이 소설을 쓰는 동안 하나의 정권(제4공화국)이 무너지고 남녘에서 불어오던 황토바람은 뜨거웠다”라고 술회할 만큼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민주화가 요동치던 격동의 시기에 쓴 작품이다. 그 당시 아무도 공개적으로 언급하려 하지 않았던 “종군위안부(일본군성노예)”, “학도병징집”, “관동군 731부대”, “해방 후 암살과 테러”, “친일파 숙청, 농지개혁”, “6.25로 명명되는 한국전쟁”, “빨치산” 등의 소재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는 점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끌기도 했다. 작가는 일체의 가감없이 일제강점기의 잔혹한 수탈, 해방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사, 한국전쟁으로 귀결된 민족분단의 자멸극을 차례로 늘어놓기도 한다. 작가가 이처럼 굴곡진 현대사의 꼭지를 들춘 이유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산업화·근대화에 치중했던 우리들이 지난날 이 땅의 자유와 광명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사람들을 보다 가치 있게 기억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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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많은 시간이 흐르고 기억은 희미해졌다. 대부분의 역사책에서도 일제강점기, 해방 후의 혼란, 한국전쟁 등을 몇몇 사건만으로 남겨 놓겠지만, 작가는 세 주인공의 처절한 생존기를 통해 시대의 거대한 물결에서 꿈틀거린 생명의 영롱한 빛을 기억하고자 했다. 그리고 우리에 앞서 존재했던 선각자들이 어떻게 그런 시대를 이겨냈던가를 배우는 것은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가를 역설하고 있다. 
지난 날, 여옥과 대치 그리고 하림이 그토록 희구하던 여명 너머의 ‘빛’이 있었다. 이제, 자유민주주의를 맞아 자유의 빛을 맘껏 누리게 된 우리는 광명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명의 눈동자들, 어둠 속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들은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 앞에서 참으로 경건하고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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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원 변호사
사법시험 제45회(연수원 35기)
국회 입법조사처 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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