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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국제중재 이야기 -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변호사가 되고 처음 소속변호사로서 일할 때, 대표변호사님으로부터 들은 충고가 있었다.
“ 의뢰인은 항상 거짓말을 해. 법원을 속이기 위해 자기 변호사부터 속이려고 하지. 변호사는 항상 의뢰인 편에 서야 하지만, 의뢰인이 하는 말을 모두 그대로 믿지 말아요.”

그 후 몇 건의 소송을 담당하면서, 대표변호사님의 충고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
다. 억울하게 돈을 뺏겼다는 의뢰인이 사실은 사기꾼이었고, 단지 호기심에 대마초를 한 대 피워 봤다는 선량한 대학생이 사실은 전문 마약상이었고… 그런 식으로 의뢰인들에게 계속 속다 보니 ‘ 이거 우리나라 의뢰인들이 죄다 어딘가 이상해서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도중, 드디어 외국 기업을 대리해서 한국 상사중재원에서 국제중재를 맡을 기회가 생겼다. 중국 기업이 한국 기업과 기술제휴를 진행하던 중 계약이 일방적으로 해제된 사건에서 중국기업을 대리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의뢰인은 중국의 대형 법무법인이었는데, 우리 법인을 한국에서의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하여 함께 사건을 해결하기를 원했다. 국제중재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큰 사건도 아니니 외국 유학을 다녀온 젊은 소속변호사들만으로 팀을 만들어 사건을 담당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결국 젊은 변호사들끼리 사건을 전부 담당하게 되었다.

중국 측에서 처음에 한국에 보낸 변호사들 또한 중국 로펌의 젊은 소속변호사들이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사건에 대해 논의를 했고, 한국법이 이 사건에 어떻게 적용될지, 어떤 증거들이 필요할지, 상사중재원에서의 중재절차는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해 설명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한국과 한국법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약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어떤 증거를 제출해야 할지, 어떤 방법으로 변론해야 할지 등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중국변호사 한 명이 불쑥물었다.

“너희 나라에선 판사를 믿어?”
“딱히 못 믿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우린 일단 법원 자체를 믿지 않아. 법보다 중요한 건 판사와의 관계야.”

 

사실 그때 뭔가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은 했지만, 한국에서도 법원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 이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궁금해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처음으로 열린 심리기일(절차협의기일)에서, 중국변호사들은 자신들에게도 발언기회를 달라고 하더니 ‘중재언어를 중국어로 하라’는 주장만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계약서에 중재언어를 한국어로 한다고 정했고, 이미 한국 법무법인이 대리인으로 선임되어 있으니 중재를 한국어로 진행한다고 하였으나 중국변호사들의 주장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첫 번째 기일이 지나가고, 두 번째 심리기일에는 파트너변호사들이 직접 한국을 찾아왔다. “전에 보냈던 변호사들이 큰 실수를 했다. 중재언어가 중국어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너흰 중재인과 친하지 않은 건가? 왜 중재언어를 한국어로 하게 그냥 놔뒀나?”라는 질문을 해왔다. 우린 오랜 시간에 걸쳐 중재언어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음을 설명하고, 특히 주장을 입증할 증거자료가 하나도 제출되지 않았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 때 중국변호사가 이런 질문을 해왔다.
“ 증거자료를 왜 우리가 모두 준비해야 하는가? 법원이나 중재기관이 양 당사자에게 제출명령을 내려줘야 할 것 아닌가? 그걸 준비 못 한다고 소송에서 진다는 건가?”

우리는 당황했고, 양국의 ‘입증책임’에 대한 이해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사실 기본적인 개념은 거의 비슷했다. 대체 왜 중국변호사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중국변호사들과 중국 측 회사를 설득하는 동안 또 한 번의 심리기일이 다가왔다. 상대방인 한국 회사는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를 계속해서 내놓았다. 방어를 위해 다시 회의를 열고, 상대방이 제출한 자료와 중국에서 가져온 자료들을 함께 검토하던 중, 우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 가져온 서류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진짜로 어떻게 된 건지 알려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마지막 서면의 제출기일로부터 며칠 전이 되어서야, 중국 측으로부터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상대방 측 주장대로, 처음부터 계약서는 우리 의뢰인인 중국 측에 불리하게 작성되어 있었고, 양 당사자가 이에 대해 충분히 논의를 한 뒤 서명한 것이었다. “왜 이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숨겼냐”고 항의하자, 중국변호사들은 “중재인을 설득하려면 우선 너희부터 설득해야 하니까”라는 황당한 답변을했다. “아니, 이게 설득의 문제냐고?”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변호사가 되던 해에 대표변호사님이 했던 충고가 다시 생각났다.

“ 의뢰인은 법원을 속이기 위해 자기 변호사부터 속이려고 하지.”


나중에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국 측에서는 처음부터 상황이 불리함을 알고, 중재절차가 끝난 후에 중재절차 자체에 흠이 있었다고 주장하여 중국 내에서의 집행을 막겠다는 계산 아래 이 모든 일을 꾸몄던 것이었다(결국 그런 방법으로 정말 집행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의뢰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어떻게든 절차상의 흠을 만드는 것’이었다. 증거서류는 없다고 잡아떼다가 들키면 할 수 없는 거고, 아니면 이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그 중재에서는 의뢰인에게 대단히 불리한 결정이 내려졌고, 그렇게 첫 국제중재사건은 뻔하지만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막을 내렸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국적 불문하고.

 

 

박서영 변호사

법률사무소 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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