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빛에도

작은 불빛에도 글자가 보입니다
빛나는 일요일과 십이월이
잠과 죽음의 고유함이
태양과 빛의 어둠이

작은 불빛에 의지해 글자가 사라집니다
당신의 굳은 얼굴이
살아나는 손끝이
영원히 죽어가는 돌멩이가

작은 불빛은 이제 곧 꺼져가는 성냥개비
영원히 가시지 않는 목마름
반복되는 더위와 계속되는 추위
녹고 있는 사탕
입속에서 태어나 곧 죽고 마는
다 하지 못한 말들
길을 찾지 못한 말들

이곳에 바람이 분다는 것을 비추는 작은 불빛들
닫힌 창문을 두드리는 죽은 이들의 간절한 손목들

생명의 작은 신호들

아파트 베란다에 설치한 실외기에 비둘기 한 쌍이 둥지를 틀었습니다. 10층은 비둘기 집으로 맞춤한 높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암수 비둘기가 서로 번갈아 알을 품고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걸 처음 발견한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자꾸 들여다보고 먹이를 주고 싶어합니다. 새끼를 건사하는 동물들은 사람을 경계하고 겁이 나면 새끼를 해치고 도망갈 수도 있다고 일러줘도 관심을 끊기 어려운가 봅니다. 급기야 저희들이 먹던 식빵 가장자리를 잘게 뜯어 비둘기 앞에 슬며시 놓아줍니다. 조그만 컵에 물도 떠다 줍니다. 겁을 먹은 비둘기들이 경계의 몸짓을 보이다가도 이내 아이들이 건네준 빵조각을 쪼아 먹습니다. 아이들은 환호합니다. 아파트 단지 산책길에서 만난 곤충, 벌레와 친구하는 아이들이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닙니다. 매미나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지렁이나 애벌레 같은 것을 집에 갖고 오기도 합니다. 도로 풀어주기도 하지만 채집통에 상추를 넣어주며 키워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길고양이가 나타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밥이 부족하면 어쩌나 걱정합니다. 도심에서 맘껏 뛰어놀 시간도, 공간도 부족하지만 아이들은 돌멩이와 꽃과 나뭇가지를 좋아하고, 나무 송진이나 개미 행렬을 들여다보며 하염없이 앉아 있기도 합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신호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흙과 먼지의 더러움에 예민한 엄마 와는 아주 다릅니다.

그런 생명의 작은 신호들을 무시하며 바쁘게 살아간 지 오래되었습니다. 해야 할 것들이 많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적습니다. 열심히 살고 있지만 어쩌면 작은 것들을 세심하게 돌보는 데에는 무관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편리함과 안락함에 중독되어 삶이라는 더 큰 조화를 위해 우리가
애써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쉽게 지나치고는 합니다. 얼마 전 한 시상식에서 제인 구달을 만났습니다. 영국의 동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그녀는 침팬지의 어머니로 유명하지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젊었습니다. 그녀 안에 고요한 생명력이 충만해 보였습니다. 그녀가 이 세계에 대해 낙관하는 근거로 든 것은 젊은이들의 에너지, 자연의 회복력, 인간의 지능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아직도 전 세계를 돌며 실천적 운동을 벌이는 제인 구달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조화롭게 이끄는 많은 실천적 움직임에 대해 말입니다.

같은 날 같은 시상식 자리에 ‘하얀 헬멧’의 대표도 있었습니다. 하얀 헬멧은 시리아 내전에서 민간인들을 구조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라고 합니다. 군인이 아닌 일반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구성된 하얀 헬멧은 구조 활동 중에 수백 명의 구조원들이 희생되었지만 6만여 명의 민간인들을 구조했다고 합니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약자와 희생자들을 위한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용기에 대해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분쟁 중인 지역이 많습니다. 인종과 종교 문제는 너무나 오래 되었고, 군부 독재와 극심한 가난, 성적 차별 속에서 많은 이들이
억압받고 있습니다. 법과 제도의 바깥에서 고통 받는 개인들의 존재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고질적인 문제들을 떠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거대한 흐름을 타고 공고해지는 권력 구조 속에서 부정부패와 윤리 의식의 부재는 우리를 자주 침몰시켰습니다. 한 개인으로서 시스템의 폭력에 저항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뜻하지 않은 재앙과 재난이 덮치기도 합니다. 어찌하지 못하는 비극에 대한 기억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저는 기질적으로 절망과 우울에쉽게 빠져드는 편이긴 하지만 희망의 불꽃을 일으켜야 하는 것도 우리들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살게 하는 이미지를 스스로 발견하고, 우리라는 더 큰 주체를 선한 끈으로 이어줄 믿음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잘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쉬지 않고 그러한 힘을 발견해 내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생명의 작은 신호들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지요.

이근화 시인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2006), 『우리들의 진화』(2009) 『차가운 잠』(2012)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2016) 등 김준성문학상(2010), 현대문학상(2013) 수상